베토벤의 음악마케팅 - 중앙일보 2000년 1월 23일(이장직 음악전문기자)
패트런(후원자)이
한 명이라면 그가 원하는 음악 수준을 가늠하기 쉽다. 하지만 갑자기 후원자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의 음악세계를 고집하기도 힘들다. 궁정음악가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반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궁정의 보호에서 벗어난 작곡가들은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곡을 쓰면서 내심 불안했다. 갑자기 부와 권력을 얻은 중산층의 음악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빈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도 베스트팔렌 궁정악장 자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수첩에 하이든과 함께 마신 커피값을 적어둘 정도로 경제적
문제에 민감했다.
경제적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택한 전략은 신문 광고로 4~5명의 패트런을 공개
모집하는 것. 몰락한 귀족들은 적은 비용으로 음악적 교양을 뽐낼 수 있었고 베토벤은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칠 수 있어 '누이좋고 매부좋은' 생각이었다.
루돌프.로브코비치.라주모프스키.리크노프스키.발트슈타인 등이 '컨소시엄' 을 형성해
베토벤을 후원했고 반대급부로 신작 악보를 헌정받았다. 그러나 저작권은 출판업자에게
악보를 넘기고 작품료를 받았던 베토벤의 몫이었다.
베토벤도 돈을 벌기 위해 마음에 없는 작품을 몇 편 썼다. 메트로놈의 발명자 멜첼이
발명한 자동악기 하모니움을 위한 '웰링턴의 승리' , 빈 국제회의 환영연에서 연주됐던
'기쁨으로 잔을 높이 들라' , 영국 시장을 겨냥한 '영국 민요 편곡집' 이 대표적이다.
그는 "작품을 제공하기만 하면 필요한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는" 예술시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저작권법이 엄격하지 않았다. '장엄미사' 를 작곡해 1820년 2월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1백25루이를 받았는데, 그는 이미 출판사 네 곳으로부터 각각
1천 굴덴의 작품료를 챙긴 상태였다. 출판사에선 악보 목록에 베토벤을 올리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작품료를 주었다.
출판업자와 2중계약을 맺는 것 외에 다른 전략도 구사했다.
어려워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작품과 '대중적인 취향의 작품' 을 한데 묶어서 계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