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9호 만화뒤집기
금붕어 2마리에 팔려가는 고길동
닐 게이먼 & 데이브 맥킨,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소금창고. 김수정, ‘아기 공룡 둘리(애장판)’, 키딕키딕.

김태권  
조회수: 2833 / 추천: 50
친구 나단이 금붕어 2마리가 든 어항을 들고 놀러 왔다. “금붕어들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주인공 ‘나’는 탐이 나서, 금붕어와 뭔가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금붕어와는 바꿀만하지만 친구에게 줘도 ‘내’가 아깝지 않을 것은 무엇일까? ‘나’는 머리를 쥐어짠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아빠’였다…….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의 파격적인 시작이다. 이 책을 만든 닐 가이먼과 데이브 맥킨은 유명한 콤비로, 국내에 번역된 만화책 ‘흑란’은 이들의 작품이다. 특히나 데이브 맥킨은 그림 잘 그리기로 전세계에 소문난 사람인데, 이 책은 그의 그림 가운데서도 너무너무 아름답다. 그림만으로도 이 책은 정말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다.

호흡을 자주 맞추던 콤비다보니, 글과 그림이 각각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면서도, 서로 잘도 어우러진다. 무엇보다도 주제를 살리기 위해, 화가는 아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한편 아빠 역시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는다. ‘나’는 아빠를 가부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빠 역시 스스로 가부장의 호기로운 ‘야심’을 부리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러다보니 자리에 없더라도 별 탈 없는 아빠.

한국 현대 문학의 특징이 ‘아버지의 부재’라 했던가. 굳이 그렇게 비장한 수사가 필요할까. 이 재치있고 재미있는 책은, 가부장과 어른에 대한 공경 따위를 즐거운 농담으로 날려버린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세계를 망치는 동안에도, 이런 농담이 가끔 터져주는 덕분에 서구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모양이다(두 작가는 공히 영국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들의 나라에서는 어떻습니까.’(브레히트) 한국의 상황은 거꾸로다. 어른에 대한 공경 자체가 농담 수준으로 치닫는다. ‘권위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서의 농담‘이 존재하는 대신, 한국에서는 권위가 곧 농담처럼 웃기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주된 논리 가운데 하나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연로한 사장님께 버릇없이 군다는 것이었다. 91년의 싸움은, 어떻게 제자가 스승에게 밀가루를 뿌릴 수 있냐며 침묵을 강요당했다. 요즘의 평화운동과 그에 수반한 반미 역시, 철모르는 젊은 것들의 치기로 치부되고 있다. 한국에 계급투쟁은 없고 세대갈등만 있다. 이 싸움에 대한 한국의 룰은, 계급을 묻지 않고, 나이든 세대가 항상 정당하다는 것이다.

아주 약간 숨통을 틔워주는 것에도 인색하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수많은 매력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고길동과 둘리의 관계이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때로는 작정하고, 둘리는 고길동을 온갖 방법으로 골탕먹인다. 어린이와 어른이 맞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던 점잖은 어르신들은,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이 만화에서 둘리가 고길동에게 반말을 쓰는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항간에 널리 퍼진 소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집에서건 어디서건 윗대가리는 다 훌륭하다고 배웠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맞다면(설마 ‘어른’들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겠는가!), 박정희 및 전두환 시절 재미를 보던 기득권 세력은 모두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래서인가. 아버지 고길동에게 반말을 쓰는 철없는 둘리를 보며, 수구 기득권 세력이 불편했던 것은. 그러나 이 가짜 아빠들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은, 얄궂게도 우리의 진짜 아빠들이다.

이 날강도들이 아빠 행세를 하는 과거의 유산을 청산해야한다. 우리는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농담을 원한다. 농담으로서의 권위는 이제 끔찍하다. 그리고 여기에 인적청산이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45년까지 일본군부 파시즘에 충성했던 자들과, 79년까지 일본군인 파시즘에 부역했던 자들과, 신군부에 붙어먹던 가짜 아빠들이 청산되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청산대상이 될 것이냐”며 목에 핏대 세우는 어용학자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해먹던 놈이 더 잘한다”며 강도가 계속 강도하던 한국현대사 아니던가.

다만 아쉬운 바는 이것이다. 이 백해무익한 가짜 아빠들과 금붕어 2마리를 선뜻 바꾸어줄 좋은 친구가 과연 어딘가에는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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