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9호 북마크
마이크 레스닉,<키리냐가>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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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무어의「유토피아」의 정치적 우화에서 윌리엄 깁슨의「뉴로맨서」의 우울한 치바시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SF에서 오랫동안 단골손님처럼 등장해왔다. 그런데 87년에 편집기획자 올슨 스코트 카드는 SF 단편선집「유토피아 Eutopia」를 기획하면서 작가들에게 작품의 기본적인 배경으로 재미있는 조건을 두가지 제시한다.

첫째는 지구 밖 소행성 어딘가에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서 실험적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고,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지구로 돌아올 수 있다. 둘째는 외부인이 아닌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시각에서 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아프리카 문명에 심취해있던 마이크 레스닉은 이러한 제안을 듣고, 「키리냐가」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

이 소설에서 유럽의 문화적 충격에 의해 무너진 케냐의 키쿠유 족의 일부는 자신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소행성으로 이주한 뒤에 그곳에서 ‘키리냐가’를 만든다. 그곳에서 키쿠유 족의 후손들은 전통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있는 코리바라는 ‘문두무구’ 주술사의 세심한 통제 하에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그들은 백인들의 문명이 도입되면서 키쿠유의 전통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키쿠유족의 전통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서 처음에는 자신들의 과거와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스닉은 ‘키리냐가’라는 유토피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아이러니한 설정 자체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코리바는 키쿠유족을 타락시킬 수 있는 유럽인들의 기술을 그토록 경계하지만 자신들이 이주해간 그 소행성 자체가 기후조절 시스템과 같은 유럽인의 기술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다. 오히려 코리바는 컴퓨터를 통해 인공위성으로 기후를 조절함으로써 자신의 주술사로서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인의 기술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키쿠유의 유토피아가 갖는 모순은 코리바라는 한 인물에게서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유럽적 문명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임하는 그에게는 하나를 허용하는 것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이가 키쿠유의 약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도 지구의 약을 거부하고, 전통의 이름으로 여자아이가 글자를 배울 수 없도록 막음으로서 자살에 이르게 하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한 노파를 이유로 부족 전체를 가뭄으로 고통을 받게 한다.

이와 같은 반대급부를 치르고도 코리바는 키리냐가에서 타락한 유럽적 ‘문명’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자연’적인 키쿠유족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지만 이러한 꿈은 근원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키리냐가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키쿠유족 중 그 누구도 과거의 키쿠유족의 삶 자체를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코리바조차도 멸종한 사자와 코끼리는 한번도 본적이 없다. 단지 그들은 문명에서 축적된 과거의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그러한 과거를 알 수 있었고 그를 키리냐가에서 유토피아로 재현해 보이려고 한 것이다.

결국 그가 사고하는 자연/문명의 이분법에서 좀더 훌륭한 가치를 갖는 자연이라는 것은, 타락했다고 생각되는 문명을 전제하지 않고는, 그 개념을 경유하지 않고는 아예 상상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 키리냐가가 근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딜레마이자 출발점이다. 유토피아의 어원이 ‘Ou 부정(not)’과 ’장소 toppos’의 결합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그리고 키리냐가의 유토피아가 ‘유럽 Europe’과 ‘장소 toppos’의 결합인 것처럼, 키리냐가는 문명의 부정을 통해서만 상상될 수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가능성의 미래로 전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이자 출발점이다.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니즘은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것은 아직 대답되지 못한 전미래의 질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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