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0호 리눅스야놀자!
젊은 해커의 초상

소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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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궁금해하는 어떤 개념과 담론을 재미있게 학습하면서 이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것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한번쯤 알아보는 것은 인식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철학이나 예술의 경우 해당 사상가와 작가의 삶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진정 제대로 된 이해가 성립된다는 생각은 다소 일반적인데 반해 상대적으로 과학기술분야에 대해서는 실용적 도구로써의 가치만을 인정해서 그런지 몰라도 인물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과학기술도 그 자체로 예술이며 철학이라는 시각을 견지해보면서, 이해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는 좋은 통로인 인물탐구에도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몇 개의 기업이 장악해오던 운영체제 세계에 어느날 리눅스라는 다크호스가 등장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증폭되고, 한 해커의 취미에서 시작되어 수년만에 전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운영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 중심에 리눅스의 창시자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라는 인물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토발즈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 가운데 하나는 리눅스를 개발한 동기 즉, 왜 리눅스를 개발했는가이다. 이에 대해 토발즈는 이렇게 답변한다. “단지 재미로(just for fun).” 리눅스의 잉태에서 탄생까지를 간략히 추억하며 토발즈가 말한 재미가 무엇인지 느껴보자.

1969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난 토발즈는 오로지 컴퓨터밖에는 관심없는 말라깽이 소년이었다. Linus라는 이름은 노벨상을 2번이나 받은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라는 과학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지어졌다. 성장 환경은 인격 형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토발즈의 부모는 모두 공산주의자 언론인이었고. 친척들은 교수나 언론계 종사자가 많았다.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에게서 자랐고 생활은 가난한 편이었다.

성장기의 토발즈는 특별히 우울한 나날을 보내지는 않았으나 평균 수준 이하의 생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가끔 돈이 없어서 전화의 채권을 저당 잡히기도 했고 사소한 돈으로 수치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낡은 집의 작은 다락방에서 창문의 햇빛을 가리고 그 앞에 컴퓨터를 놓은 후 작업실로 삼았으며, 책상 바로 뒤에는 침대가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토발즈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으나 주류에 속하거나 엘리트는 아니었다. 언뜻보면 해리포터를 닮은 얼굴에 그다지 사교성도 없었고, 체육도 싫어했다. 사춘기 때 또래 여학생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컴퓨터를 갖고 뭘 할 수 있을까에만 몰두했다.

그의 어머니는“쟤는 캄캄한 방에 컴퓨터만 들여놓고 가끔 마른 파스타만 던져주면 만족해한다”며 양육비가 적게 드는 아이라고 자랑(?)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군복무 후 대학에서도 운영체제 개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저 컴퓨터를 좋아하는 괴짜일 뿐이었다. 하지만 1학년을 다닐 무렵 한권의 책을 접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운영체제 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 토발즈의 인생은 완전히 바뀐다.

토발즈가 회고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 <성경>이나 <자본론> 같은 책이지만 자신에겐 <운영체제: 디자인 및 실행>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타넨바움이라는 네덜란드의 한 대학 교수가 유닉스 학습을 위해 개발한 미닉스(Minix)라는 유닉스 축소판을 소개하고 있었다. 토발즈는 그 책을 읽으며 유닉스 이면에 자리한 철학과 그 운영체제가 얼마나 간결하면서 강력하고 아름다운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토발즈는 이내 아르바이트를 통해 유닉스를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구입했고, 책과 함께 날아든 뜨거운 열정은 그를 유닉스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끌며 떠날 줄 몰랐다. 토발즈는 간결하고 아름다우며 예외를 최소한으로 인정하는 유닉스의 단순명료한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 이러한 기술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유닉스 초창기에 활약했던 해커들의 문화적 토양이었던 히피문화에 강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91년에 전설적 해커 리처드스톨만의 강연을 듣게 된다. 토발즈에 의하면 어떤 새로운 빛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리눅스에 소스코드의 자유로운 열람과 수정 및 배포를 허용하는 지피엘라이선스(GPL)를 적용한 것은 아무래도 당시 스톨만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토발즈의 작업은 미닉스로부터 출발했지만 미닉스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날 (원격지 컴퓨터를 마치 자신의 컴퓨터를 다루듯 해주는 프로그램인) 터미널 에뮬레이터를 만들면서 갖가지 기능들이 필요하게 됐고, 이것들로부터 리눅스의 최초 작업이 시작됐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데이터를 읽고 저장하는 모듈들을 스스로 구현하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리는, 좌절의 연속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 다음은 셸(shell)이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일종인 배쉬(bash)를 이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좁은 방안에서 컴퓨터에만 매달려 몇 개월을 보낸 후 드디어 셸이 제대로 구동되었고. 셸이 동작하자 그 다음부터는 일들이 잘 풀리면서 서광이 비취기 시작했다. 그해 8월에 리눅스 버전 0.01은 취미로 만든 운영체제임을 밝히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발표됐고, 이어서 0.02, 0.03버전으로 개선되었다. 이듬해에는 하드디스크를 메모리처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 디스크 페이징이 구현된 0.12가 발표되면서 리눅스를 사용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이 버전부터 저작권에 대해 고민하다가 GPL이 적용되기 시작했으며 이와 더불어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토발즈는 리눅스를 돈을 받고 판매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탐욕에 대한 핀란드의 전통적인 태도와 통계학자였던 학구적인 할아버지 그리고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받은 영향, 그리고 인터넷에서 무상으로 구한 스톨만의 지시시(GCC) 컴파일러와 같은 수많은 도구들 덕분에 리눅스 작업이 가능했다는 점을 들었다.

리눅스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까지의 일화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몇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토발즈가 핀란드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그가 인간의 삶의 가장 가치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열정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회적 협동의 네트워크가 더 나은 삶으로의 진보를 위한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돈 많이 버는 능력있는 프로그래머에 머물렀을지언정, 정보사회 혁명아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가 재주를 넘어선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재미로’ 라는 그의 짧은 답변이 암시하듯이 공동의 사회적 삶을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실현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 그 자체를 즐기는, 삶에 대한 철학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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