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0호 만화뒤집기
웃음의 기술, ‘크로마티 고교’

김태권  
조회수: 3285 / 추천: 55
<영감이 떠올라준다면 좋은 만화를 쉽게 그릴 수는 있을 터. 그러나 작업량으로 승부하는 만화라는 장르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영감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릴 수는 없는 일.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것은 대체로 기술의 덕이다. 웃기는 데에도 기술이 있다.

"돌격! 크로마티 고교". 근자에 가장 평이 좋은 개그 만화. 인물들은 소망에 맞지 않는 행위를 저지르며, 행위에 어울리지 않는 소망을 고집한다(이는 전형적인 희극 상황으로, 베르그송이 정리한 웃음의 메커니즘에 딱 들어맞는데, 이 점은 다른 기회에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소망과 행위의 부조화, 그러나 어느 쪽도 희생하려하지 않는 집착 - 이것은 사실 자본제 사회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기도 하거니와(예컨대, 개별자본이 이윤을 추구할수록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총자본의 위기가 심화되는 등등) - 깡패고등학교의 괴짜들이라니, 확실히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만화의 매력을 설명할 수는 없다. 설정만으로 웃길 수 있다면, 만화가란 얼마나 놀고먹는 직업이었겠는가? 아무튼 ‘크로마티’에는 설정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흔히들 호흡이 좋다고들 한다. 특히 애니메이션(국내 케이블 채널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도 재미있지만, 인쇄 만화 쪽이 더 감칠맛 난다고들 한다. 이 중평(衆評)에 숨은 뜻은?

영화 및 만화 작법 가운데 간혹 웃음의 기술(또는 감동이나 충격의 기술)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들이 있다. 간추리자면, 독자(관객)를 웃기려면 적어도 세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 ‘크로마티’의 황당 개그를 예로 들어보자 : ‘허걱! 고등학교에 웬 외계인?’

이 생뚱맞은 유머를 어떻게 제시하면 좋을까? (1) 우선 바람잡이. 개그를 부각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이다. “앗! 큰일났다! 저게 뭐야?” (2) 개그를 터뜨린다. “학교에 떨어진 운석에서 외계인들이 튀어나오다니!” (3) 마무리. 개그에 대한 반응(reaction), 개그에 의한 여파(aftermath). “크윽! 말도 안 돼!”

요컨대, ‘고등학교에 외계인이 나타난다’는 중심 개그를 살리기 위해, 앞과 뒤에 각각 적어도 한 장면 이상씩을 깔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크로마티’의 각 에피소드는 6쪽이다. 6쪽 원고의 경우, 책을 펼치면, 2면과 3면이 마주보고, 4면과 5면이 마주본다. 펼침면을 기준으로 이렇게 4덩어리로 나뉨 : 1면, 2-3면, 4-5면, 6면. 그렇다면 생각해보자(아무 책이라도 펼쳐 보시면 이해하기 더욱 쉬우실 듯).

눈에 가장 잘 띠는 곳은 네 덩어리 각각의 왼쪽 위이다. 그 중 1면 톱(top)은 제목과 전체의 상황 제시에 써야한다(6쪽이라니 상당히 빡빡하군). 그렇다면 중심 개그를 배치하기 가장 좋은 ‘명당자리’는 2면·4면·6면의 상단이다. 이곳 말고도 3면과 5면의 상단 역시 어지간한 개그를 넣기에는 차선의 장소이다.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지만,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의 흐름이 잠시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그 각각의 앞과 뒤에 ‘바람잡이’와 ‘반응’을 넣어주어야 한다. 막상 이렇게 쪼개놓고 보면, 6쪽의 ‘분양’(즉, 만화용어로 ‘콘티 잡기’)이 거의 다 끝난다. 나머지는 최소한의 스토리 진행에도 빡빡하다. 만일 스토리 진행에 더 많은 컷이 필요하다면, 입주한 개그 중 만만한 녀석을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이 설계도를 확인해 가며 ‘크로마티’를 즐기시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가 될 듯. 아무튼 영감보다는 삭막한 계산에 쫓겨서 나오는 것이 개그 만화이다. 페이지가 적을수록 콘티를 잡는 것은 더욱 힘들다(작화는 물론 쉽다-어느 쪽이 만화가에게 더 유리한지는 하늘도 모를 일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만화를 구성하는 일은 자유시를 읊는 것과는 다르다. 압운이 정해져 있는 스무 글자의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짓는 것만큼이나 빡빡한(그래서 재미없는) 일이다. 작가는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이른바 ‘하던 가락’대로) 계산을 적용한다. 그러나 저자의 꽉 짜인 계산이 맞아떨어진 덕분에, 나는 ‘크로마티’를 읽으며 신나게 낄낄거릴 수 있는 것이니, 그것만큼은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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