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0호 북마크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
타자의 이해가능성

이규원  
조회수: 3811 / 추천: 56
<사람들이 고전적인 SF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클리쉐(cliche)들은 광대한 은하계를 탐험하는 우주선들과 고도로 훈련된, 매끈하고 화려한 복장의 승무원 그리고 미지의 외계인일 것이다. 이러한 소설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류의 타자로서의 외계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허버트 웰즈의 <화성침공>에 등장하는 문어를 닮은 화성인의 삽화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은 외계인으로서 타자의 이미지일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SF소설은 다음의 3가지 시나리오들을 변주하곤 한다. 첫째, 평화로운 지구를 침략하러 나타난 외계인들을 한 위대한 영웅이나 지구인들이 힘을 합쳐 무찌르거나, 아니면 영웅의 활약과 중재로 외계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거나―이럴 때는 항상 한 지구영웅과 외계인 간의 아름다운 우정이 첨부된다―혹은 지구인이 우주로 진출해 미지의 행성을 점령하려고 할 때 외계인과 조우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는 지구와 우주의 차이를 단지 과학적 발전의 양적차이로 환원할 때만, 즉 우주를 지구의 외연적 확대로 볼 때만 가능한 도식이다. 그러나 지금 소개하고자하는 스타니스와프 렘의 기념비적인 SF소설,「솔라리스」는 이러한 도식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소설이다.

<솔라리스>는 두 개의 태양을 공전하는, 전체가 바다로 구성된 행성이다. 조사를 통해 바다는 그 자체가 의사를 가진 생물로서 판명되고, 그리하여 솔라리스 상공에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솔라리스와 접촉하려 한다. 그러나 바다는 구성성분이나 존재가 지구의 과학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고, 많은 접촉시도에도 일체의 반응을 나타내지 않아 아무런 성과 없이 한 세기가 흘러 솔라리스학이라는 학문은 무의미함의 대명사가 된다. 어느 날 켈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 연구자로 파견되는데, 그는 도착하자마자 스테이션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선임 연구자는 이미 자살했고 나머지 연구원들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는다. 선임자의 남겨진 노트를 통해 캘빈은 스테이션에서 얼마 전 바다를 향해 X선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그 후 연구원들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솔라리스는 인간의식의 가장 내면화되어 있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감추어진 기억을 읽어내어 그 이미지를 현실화하여 기억의 주체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캘빈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10년 전에 격렬한 다툼 후에 약물을 먹고 자살했던 아내 레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정말 레아와 똑같지만 캘빈 외에는 아무 기억도 없고 잠도 자지 않고 캘빈 옆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캘빈은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으로 반쯤 미칠 듯한 상태에서 결국 레아를 소우주선에 태워 우주의 미아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다음날 캘빈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의 레아를 자신의 방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왜 솔라리스는 가장 심층의 기억을 재현해서 자신에게 보내는 것인지, 레아는 누구인지 과학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미지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렘은 러시아어판 서문을 통해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렇지만 우주는 지구의 단순한 외연적 확대가 아니지 않은가? 또한 우주에는 전적으로 미지의 존재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존재가 인류의 지성과 과학을 통한 이해가능성을 아예 넘어서있다면?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공유하는,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전적인 타자가 존재한다면? 렘은 <솔라리스>에서 이렇게 미지의 존재와 대면이라는 상황 속에서 인간존재의 의미를 매우 사색적으로 탐색한다. 어슐러 르귄의 말대로 SF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상상이라는 것을 사고한다고 할 때, 이 지점에서 렘은 이미 외계생명체라는 주제와 미래를 예측하는 SF라는 협소한 반경을 넘어서서 타자를 사유하도록 한다. 서구SF에서 유색인종들이 종종 타자의 위치에 놓여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레아가 흑인이라는 설정은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동구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렘의 독특한 위치는 이를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위치를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항상 인류가 타자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능성의 맹신과 이해 불가능성의 부정과 제거 사이를 진동해왔다는 사실만을 보여준다. 타자의 이해가능성 혹은 불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과연 얼마나 자신을 성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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