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1호 여기는
한 배우의 죽음을 바라보는 악의 평범함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이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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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고인에게 또 하나의 누가 되는 건 아닐지 벌써 걱정이다. 한 공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이에게 건네는 말이 되고, 그 장소가 여러 사람에게 공개된 곳이라면 사정은 아주 다르다. 때론 그저 무관심하기만 해도 충분한데 그 정도 자제력을 갖춘 이가 정신나간 말을 할 리 없고,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자제력을 갖췄을 턱이 없으니 그런 상황은 멀고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인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단순한 스펙타클(눈요기로서의 영상)로 바라보고 있나?

CBS노컷뉴스에 실린 “故이은주의 죽음, ‘언론은 더 드라마틱한 사연 원했다’” 기사에서 인용한 담당 형사의 말에서 타인의 고통을 원자재 삼아 엇비슷한 싸구려 상품을 찍어 팔아대는 언론의 추악한 행태를 본다. “제발 고인을 생각해서라도 소설은 쓰지 말아주십시오.” 형사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뉴스 상품이 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쓰레기, 파파라치 언론은 배우의 자살 원인을 몇 가지 시나리오에 집요하게 꿰맞추고, 추측하며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 냈다. 속칭 연예인X파일과의 관련성도 빠질 리 없다. 기사 안에는 HOW와 WHY를 뺀 4하(四何)원칙만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 쓰레기 기자들께서는 충분히 몸소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꼴보기 싫은 것으로 순위를 매기면 늘 상위를 다투는 곳이 포털 연예뉴스의 독자의견란인데 어찌하여 눈을 돌린 그 곳은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 개인의 죽음을 웹 서핑의 노리개로 삼는 한 개인의 추악함을 본다. 너무 지저분하여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더 많지만 무덤덤하게 작성된 저 세 종류의 덧글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다음 생에는 글씨 연습 좀 하세요.”
“X파일에 별로 나쁜 말 없었는데.”
“공부해야하는데 신경쓰이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을 박멸하기란 쉽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점점 교묘해지는 스팸 광고나, 죽여도 죽여도 끝이없는 해충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도 우리처럼 일상에서는 아주 평범한 인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인지 찾아서 고발하고, 고발에 앞서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우리 속에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근본 악을 발견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 지음)을 번역한 이진우 씨는 역자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으로서 근대적 근본악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철학자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조건을 철저하게 사유한 삶을 살았다. (중략) 그 철저함에 있어서는 오직 로자 룩셈부르크만이 한나 아렌트를 능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1960년 5월 24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로 압송됐을 때, 한나 아렌트는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 과정을 보도하겠노라고 ‘뉴요커’에 제안한다. 재판은 다음 해 열렸고, 아렌트는 악의 진부함에 관한 보고서, “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를 썼다. 이 글은 아이히만이 처형된 직후인 1963년에 책자로 발간됐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악이 보여주는 지극히 진부한 평범함이었다. 끔찍한 악을 저지르고 있는 당사자는 종종 어떤 집단이나 사회 속에 속한 평범한 성원일 뿐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 충실한 부모, 착한 이웃, 성실한 직장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유의 부재 속에서, 우리 안에 갇혀있던 악은 아주 진부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포털 연예뉴스 게시판에 출연하고, 소설은 쓰지 말아달라는 형사의 얘기를 듣고 무릎을 탁 치며 회사에 전화를 걸게 만든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뉴스나 좀 보고나서 공부 좀 하려고 하는데 누군가의 괜한 죽음 때문에 짜증이 난다.

악의 평범함, 그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과오라는 점에서 더 두렵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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