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1호 과학에세이
자살은 없다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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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통계로 2003년 한해동안 10,932명이 자살했다. 하루 30명, 48분에 1명꼴로 자살한 셈이고, 인구 10만명당 자살율이 27명으로 전체 사망원인 중에서 5번째로 수직상승했다. 게다가 자살을 기도했던 사람의 숫자가 연평균 35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실로 자살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 겨울 들어서서 주변의 잇따른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노조 활동가의 자살부터 또 다른 활동가 동지의 부인의 자살, 그리고 배우 이은주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것은 우울증(병)에 대한 다양한 억측과 상상들이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체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고, 약물치료든 심리치료든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국내 자살자의 80% 이상이 우울증 환자로 추정된다는 보도도 있지만, 정작 우울증에 대한 이해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여타의 질병에 비해서 너무도 판이하다.

누군가 암에 걸렸다면 주변의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 죽음까지 염두에 두고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군가 우울증에 걸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문제가 된다. 다른 질병에 비해서 우울증은 그저 심리적인 불안정의 문제요, 개인 의지의 문제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그것이 우리 이웃들로 하여금 치료 한번 받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뒤늦게 우리를 땅을 치고 통곡하게 만든다.

아포토시스(apoptosis)라는 개념에 한 때 매료된 적이 있다. 정상적인 세포가 어떤 환경에 놓였을 때 유전자에 기억된 어떤 경로에 따라 세포가 스스로 축소하고 핵이 응축하면서 DNA가 규칙적으로 조각나서 죽어버린다. 세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불과 3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세포의 죽음은 네크로시스(necrosis)로만 알려져 있었다. 네크로시스는 화상과 타박, 독극물 등의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세포의 죽음으로, 세포의 ‘사고사’라고 할 수 있다.

아포토시스는 짧은 시간에 질서있게 진행되는 세포의 능동적인 죽음의 과정이기 때문에 세포자살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아포토시스는 발생과정이나 몸의 형성과 유지에 꼭 필요한 것으로서, 가령 태아의 손은 생성초기에는 손가락 구분이 없는 주먹 형태지만, 손가락 사이의 세포들이 아포토시스를 거쳐 스스로 죽음으로써 남은 부분이 손가락이 된다. 암에 전이된 세포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아포토시스를 통해서 세포가 스스로 치유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아포토시스는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하는 세포 단위의 ‘공익을 위한 자발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세상에서도 아포토시스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모든 행위는 범죄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이든 그 무엇이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의 원인은 이 사회에 있고, 우리가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그 책임을 죽은 자의 것으로 돌리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 타살이 된다. 자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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