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1호 최현용의
네트워크의 무법자, DRM
아. 불새가 날자 X-File은 저멀리 내쳐지고 말았다

최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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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읽어 보았겠지만, “광고 모델 DB 구축을 위한 사외전문가 Depth Interview 결과 보고서”라는 거창한 이름의 긴 보고서가 “연예인 X-File”(이하 X-File)이라 불린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이 발주하고 전문업체인 동서리서치가 제작하였으며, ‘사외전문가’라는 제목에 걸맞게 연예계 ‘대기자’들이 우루루 설문에 참여한 역작이 바로 X-File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런 소중한 보고서가 누군가에 의해 유출되어 결국은 인터넷상으로까지 퍼지고 말았다.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버린 것이다.

X-File이 유출되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거나 피해에 직면하여 심각한 분위기다. 거론된 당사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설문에 참여한 기자들은 겨우 상품권 몇장 받아먹자고 한 일 때문에 생업에서 쫓겨나는 일마저 벌어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근심은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미국처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존재한다면, 이 두 회사는 거액의 손해배상에 문을 닫을 것이 확실할 정도의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웃었거나, 웃을 수 있는 업체가 있다면?

물론 여럿이 있겠지만, 가장 크게 웃은 이들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도베(ADOBE), 한글과컴퓨터일 것이다.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X-File이 인터넷에서 확산될 때 어떤 문서형태로 퍼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답이 나온다. 애초 원본 문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리젠테이션 문서작성기인 파워포인트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본 문서는 파워포인트 문서를 변환시킨 아크로뱃 피디에프(PDF) 문서였다.

하지만 그저 이런 문서형태로 퍼졌기 때문에 이들이 웃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두가지 문서형태를 작성하는 소프트웨어인 파워포인트와 아크로뱃에서 가장 강조되는 기능이 바로 디지털저작권관리(DRM) 기능이기 때문이다. 문서를 작성할 때 적절한 회사내 규칙에 따라 암호화기능이나 사용규칙을 미리 문서에 삽입하면, 그 규정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문서를 볼 수도 없고 인쇄할 수도 없다. 이런 관리 기능들을 강조하며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라고 기업들에게 선전하던 차에, 이런 관리 기능을 사용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엄청난 사건이 현실에서 터졌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마케팅사례인가. 마이크로소프트, 아도베 그리고 경쟁사인 한글과컴퓨터까지 내심 웃는 속을 감추느라 참으로 힘들었을 듯 하다.

물론 여기서 이들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라고 광고하는 것은 아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그들의 제품을 광고하는 웹사이트를 방문하시기 바란다. 뭐 회사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100만원 안쪽이면 범용 문서작성기를 이용한 초보적인 수준의 디지털저작권관리 솔루션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1 복제당. 여기서 X-File을 길게 말하는 이유는 사실, X-File의 사회적 파장에 대한 의의와 평가, 우리의 입장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들 눈치 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디지털저작권관리시스템 확산의 전환점이 될 사건이 바로 X-File사건일 것이라는 본인의 예측 때문에, 그래서 이 시스템이 무엇인지,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서론이 되겠다. 이제 본론 시작이다.

DRM이란 ‘Digital Rights Management’의 약자다. 길게 풀자면, “디지털 컨텐츠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목적으로 컨텐츠의 안전하고 편리한 배포를 가능케하는 기술과 서비스”가 된다. 이걸 다시 풀면, “DRM은 디지털 컨텐츠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작권자가 배포하는 ‘라이센스’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기술적으로 보장해주는 시스템”이다. 저작권 보호의 대상인 디지털 컨텐츠는 배포시에 이미 기술적인 보호조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사용자가 이 기술적인 보호조치가 이미 완비된 컨텐츠를 사용하고자 할 경우, 사용을 허가하는 라이센스를 획득해야만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 - 이걸 DRM이라고 하는 것이다.

뭐 이건 소리바다에 제목과는 다른 엉뚱한 MP3 파일을 음반사들이 고의로 엄청나게 올리는 정도와는 아예 다른 수준의 시스템이다. (참고로 소리바다에 속임수파일(FakeFile)을 올리는 걸 언론에다 자랑스럽게 떠드는 음반사들은 역으로 소리바다 측에 고소당할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사용자는 저작권자로부터 ‘라이센스’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걸 본적이 없으시다고? 요즘 누구나 ‘글을 읽기 위해서는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라는 경고창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로그인을 요구하는 것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라이센스’를 발급받는 행위이다. 이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DVD를 보는 것도 ‘라이센스’를 발급받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DVD를 미국가서 틀면 잘 나올까? 궁금하다면, 한번 확인 해보라.

한마디로 디지털매체를 이용하는 누구나 DRM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없다면, 내가 여기다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가 많다. 그것도 아주 많다. 너무 많아서 이번 달 뿐만 아니라 다음달에도 속편을 실을 예정이다.
가장 먼저 리눅서로서 지적할 수 있는 건, 대부분의 DRM이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 특성을 심하게 탄다는 점이다. DVD를 리눅스에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어떤 훌륭한 리눅서가 DivX를 만들수 밖에 없었다는 전설같은 얘기는 결코 전설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그것도 XP가 아니면 DRM이 제대로 작동할 확률이 없다는 점은 ‘기술적으로 보장된 안전하고 편리한 배포’라는 DRM의 정의를 아주 우습게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 리눅스라는 운영체제 차원에서 DRM을 기술적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리누즈 토르발즈의 언급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 보기로 하자.)

더구나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이렇게 DivX를 만드는 등의 정당한 행위조차도 ‘기술적 보호조치를 무력화하는 행위’로 처벌받아야만 한다는 점이다. 저작권법 16조, 20조, 92조. 온라인디지털콘텐츠산업발전법 제18조.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제29조내지 제30조. 온통 제대로 쓸 수 없는 무능한 기술적 보호조치조차 법은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용자로서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가로막으면서까지 말이다. 억장이 터지는 일이다. 예전엔 LP 음반을 사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워크맨에서 듣던, 내 PC에서 듣던, 그건 내 맘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것도 불법이 될 수 있다. 기술적 보호조치를 우회하고 있기 때문에.

두번째로는 라이센스의 저작권 보호기간이라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술적 보호 조치는 기간을 인식할 수 없다. 애초부터 기간 설정을 제한하는 DRM 기술이 아닌 이상 ‘저자 사후 50년’이라는 저작권 보호 기간을 넘더라도, 그 보호조치는 해제되지 않는다. 이런 걸 보면, 애당초 DRM이라는 기술이 저작권법이 만들어진 기본적인 의의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어떤 경우라도 저작권은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권리이다. 인권과 같은 무제한적인 권리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권리 제한의 경우와 예외 조항들이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DRM기술은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라이센스를 발급해서 돈을 긁어모을 것인가에만 관심있는 자본의 기술인 것이다. 그렇다. 기술에도 계급이 있다.

여기까지. 나머지는 다음 달에. 기대하시라.

아. 불새가 날자 X-File은 저멀리 내쳐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웃으며 맞을 이들은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일 것이다. 불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여전히 인권의 문제와 저작권-공정이용의 문제, 그리고 그 모두를 현실적으로 규율하는 기술의 문제가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자본과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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