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1호 사이방가르드
희망을 그리는 삽화가들 셋, 하퍼, 드루커, 그리고 사트라피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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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지면에는 현재 활동도 그렇지만, 앞으로 주목받을만한 아나키(anarchy) 계열의 두 인물과, 이 둘과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일상 속에서 정치를 그려내는 한 여성을 한 묶음으로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아나키’라 하면 흔히 무정부 상태의 혼돈을 뜻하는 말로 오해하는데, 여기선 의미의 긍정성을 따져 권위와 집중을 헤치는 힘으로 이해한다. 물론 아나키즘을 현실적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목표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인간 관계가 가능한 소규모 공동체(코뮨)의 구상에 있다.

아나키의 목표의 근사치에 서 있던 인물은 영국의 아나키스트 삽화가, 크리포드 하퍼(Clifford Harper)다. 그는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예술가다. 13살 때 북부 런던의 학교로부터 쫓겨난 뒤로, 60년대 빈민운동에 앞장서 도시 빈집점거(squatting)와 코뮨 운동으로 실천 활동을 넓히고, 70년대 제도교육 없이 삽화가의 계열에 오른 독특한 인물이다. 『계급전쟁 코믹스』(1978), 『급진기술』(1974) 등으로 자신의 아나키즘에 대한 초기 의식을 그림으로 옮기다가, 『아나키』(1987)에선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와 삽화를 통해 그의 시각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가 지닌 펜의 질감에선 목판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강렬함과 날카로움, 부드러움이 동시에 감지된다. 코뮨의 이상을 그릴 경우 부드러움이, 억압과 비참에 대한 저항에선 강렬함이 온전히 살아 있다. 50대 중년을 넘긴 그는 아나키스트 책박람회를 조직하고, 소규모 독립출판업 운동을 주도하고, 영국의 진보일간지 ‘가디언’에 정기적으로 그림을 싣는 등 아직도 예술과 실천 활동에 여념이 없다.

그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긴 하나, 도시 빈민, 빈집점거 등 현실 실천운동에 개입하며 삽화 창작을 해온 뉴욕의 젊은 작가가 하나 있다. 에릭 드루커(Eric Drooker)가 그인데, 「홍수!」, 「피의 노래」가 그의 대표작이고 현재 ‘더 프로그래시브’ 등에 삽화를 연재한다. 드루커의 주무대는 권력, 비인간성과 소외로 점철된 맨하턴 도시 한복판이다. 넝마꾼, 동냥꾼, 거지, 노숙자, 굶주린 아이,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흑인, 방독면 쓴 전경들과 곤봉 든 경찰,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 경찰견,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끝없이 내리는 비, X-레이에 비춰진 뼈들로 표현되는 소외된 인간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자본주의의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두운 현실로 표현된다.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날아오르는 비둘기,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인간 태초의 전경과 원주민, 여성과 자연, 앙상한 인간들의 뼈 속에 감춰진 심장, 그리고 권력에 저항하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로 겹쳐진다.

흥미롭게도 드루커는 전미 지역을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을 매년 정기적으로 갖는다. 필자도 한번 구경했던 그의 공연에서, 드루커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입으로는 연사처럼 한 쪽에서 이야기를 풀고,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는 여러 악기를 연주하며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한마디로 온천지 동네를 돌며 구전을 전하는 입담꾼의 역할을 자처한다. 구경꾼들은 그의 슬라이드 시연에서 소외와 억압에서 인간이 희망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확인한다.

드루커와 하퍼의 정치적이고 아나키적 만화와 성격은 다르지만, 최근 이란 태생의 사트라피(Marjane Satrapi)라는 여성을 주목하고 싶다. 그녀는 프랑스에 살면서 그 곳에서 4권의 『페르세폴리스』란 책을 연재하고, 이를 영어판 2권으로 묶어 일약 스타가 된 여성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삽화가로 활동하던 그녀가 정치 만화가인 쉬피겔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성장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영어판 1권은 어린 유년시절 겪은 이란 혁명과 이란과 이라크 전쟁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유럽의 유학 생활과 고국에서의 결혼과 이혼 생활을 그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유년 시절의 눈과 마음으로 권력을 바라보고, 역사와 혁명을 보고, 이란의 남성주의를 대한다는 점이다.

전혀 실천가라고 할 수 없는 사트라피의 유년 성장기에서, 독자는 수없이 많은 뉘앙스와 모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란의 검열사회 속에서 웃지 못할 행태들, 남성의 위선들, 거리에 즐비한 혁명전위대들의 검열들(화장, 머리에 쓴 검은 천과 옷모양새), 파티의 검열, 밤늦은 군인들의 습격과 고문, 총살, 가두시위, 그리고, 종교 사회 속의 미국 소비문화 등이 일상 속에서 흥미롭게 진술된다. 사트라피의 책은 이론을 얘기하고 실천의 대의를 주장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살면서 겪었던 한 소녀의 느낌 그대로다. 앞의 드루커와 하퍼의 강한 남성적 그림에 비교하면, 그녀의 만화에는 겉보기에 단조로운 일기식의 여성적 문체 외에는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그저 일상의 서술로만 읽히지 않는데 그 매력이 있다. 독자들은 그녀의 글에서 아랍의 얼룩진 정치 문화, 인간의 허울과 욕망, 뿌리깊은 남성성 등을 뼈저리게 배우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들 독자들에게 삽화가라 하면 작가 다음의 서열로 인식되는 느낌이 많다. 이들 셋처럼 자기의 독자적 글을 내 성공하기 전에는 전혀 인지도가 없기 마련이다. 이들은 삽화의 지위를 글 이상의 반열에 올렸고, 게다 만화를 통한 정치 학습에 크나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비록 이들 셋은 언어 코드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틀리지만, 당대 사회의 억압과 모순과 부조리에 강하게 반응하고 그 속에서 흔들릴 수 없는 인간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잡지를 보다 발견하는 그들의 그림들은 대안이 불투명한 우리네 현실을 비추는 조명처럼 환하다.


관련 페이지

Clifford Harper : http://www.agraphia.uk.com/home.html
Eric Drooker : http://www.drooker.com/
Marjane Satrapi : http://www.randomhouse.com/pantheon/graphicnovels/satrap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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