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1호 만화뒤집기
점점 암울해지는 세계
후루야 미노루, ‘이나중 탁구부’에서 ‘두더지’로

김태권  
조회수: 2875 / 추천: 53
오늘날의 사회는 젊은이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어느 계급에 일생을 걸어볼 것인가?

젊은이는 노동계급에 편입되어 ‘안정된’ 월급쟁이의 삶을 따라갈 수도 있다. 가끔 천만분의 일이란 가능성을 바라보며 자본계급에 응모해볼 수도 있다. 어울리지도 않게 무계급사회를 자처하는 자본주의인지라, 가물에 콩 나듯 성공신화를 만들어주지 않던가. 그러나 조금만 제정신이 박힌 젊은이라면, 그 위험한 도박에 선뜻 뛰어들기는 싫을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다만 시간을 벌고자 한다. 현실에서 눈 돌릴 따름. “알려고 하지 않는 용기”(‘탁구부’ 마에노의 대사).

그런데 현실은 더욱 어둡다. 요즘 세상, 어디 노동계급의 삶이라도 충분히 안정되어 있던가? 그 완벽하다던 자본주의도 상황이 마냥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종내는, 자신감만 점점 사라질 뿐.

작가 후루야 미노루. 전작(前作) ‘탁구부’의 한 에피소드에서, 악동 마에노와 이자와는 모범생들을 공격한다. 어차피 남들하는대로 졸업해서 남들하는대로 진학하고 남들하는대로 취직해서 남들하는대로 가정을 꾸린 후 남들하는대로 죽을 일생이 아니냐며. 이렇게 줄줄 주워섬기고 한다는 말이, 모범생의 삶이란 이미 다 살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무덤에 넣어버리자는 것이다. “묻어도 되겠습니까?” “묻어버려! 묻어버려!”이런 그들에게, 탁구부 고문선생이자 몸만 사리는 소심한 시바키 선생은 역시 소심한 말을 들려준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악동들은 분개한다. “이 패배자!”

그러나 ‘크레이지군단(원제: 나도 간다)’과 ‘그린힐’을 거치며, 작가의 글과 그림은 점점 사실에 가까워지고, 작가의 세계관은 점점 어두워만 간다. 본디 회화나 문학에서 사실주의(寫實主義)란, 현실의 비참함을 담아낸다는 뉘앙스를 가진 용어였다.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사회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시 좌익의 생각에, 19-20세기의 현실은, 있는 그대로만 그려낸대도 아주 추하고 비참한 것이었나 보다.

작품 ‘두더지’에서, 그림은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안으로 더욱 녹아든 현실. 그러나 그 현실은 곱지만은 않다. 거친 피부 ? 처진 살집 ? 생기 없는 표정의 묘사는, 이제 기괴하거나 우스꽝스럽기보다, 역겨운 느낌을 준다. 내용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은 더 이상 중학생도 아닌 것이다. 중학교 탁구부라는 온실에서 떠나, 현실에 내팽개쳐진 신세일 뿐. ‘탁구부’에서 그토록 인상 깊던 유머는 점점 줄어, 이제 작가는 별 개그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컷 나누기 역시, ‘탁구부’처럼 개그를 살리기 위한 연출이 아니다. ‘두더지’에 이르면, 컷의 모양과 크기도 무난하고 비슷하다. 이런 컷은, 연출보다 컷 안의 내용에 신경을 쓰게 하는 경향이 있다. 독자는 컷 안에 묘사된 현실 풍경에 보다 관심을 쓴다. 유달리 작가가 신경을 써서 크게 배려하는 컷은, 다만 인간 내면의 깊고 깊은 어두움을 드러내 보이는 심리 컷.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근대 이후 주요한 미감으로 부상했다던, 바로 그 ‘숭고(崇高)’의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현실에 파산선고를 내린다. 이제 와서 “평범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음이 판명된다. 아니, 심지어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일이다. 주인공은 묻는다. “아무래도 힘들겠지?” 이제 와서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머리털이 쭈볏 곤두서는 전율을 미리 망치고 싶지 않으므로, 내용을 미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4권 말미에 가면, 등장인물 한 명이 아름다운 미래를 노래한다. 그것은, 이 어둡고 끈적끈적한 만화에서, 구원의 계시처럼 튀어나온다. 그 밝은 별자리의 이름은, 바로 ‘평범한 생활’이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거야, 우리도. 남들처럼 월급쟁이가 되고, 노동계급에라도 편입될 수 있을거야. 지금처럼 미래가 없이 살지 않을 수 있을거야. 이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다 나려고 해.” 그리고 그 등장인물은 눈물 한방울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다.

그 허구적인 ‘이나중학교’에서, 탁구부의 악동들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가끔 악마숭배의 시늉도 하고 짓궂었으나, 그런 그들도 현실 앞에서는, 차라리 요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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