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2호 사이버
당신의 권력과 말하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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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최대한 자신의 포지션을 명확히 밝히고 발언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화자가 놓여져 있는 사회문화적 포지션을 알아야 그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시각의 맹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인식의 사각지대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들은 아무런 악의나 편견 없이 여성의 현실에 대해 무지하고 여성들의 불만에 진심으로 의아해한다. 자신이 살아온 맥락에서 그들의 삶을 알아야 할 필요와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타자의 삶에 대한 정보가 자신이 성취해야할 권력화된 지식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 노동자, 노인의 삶에 대해 무지하고 무식하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사실 무지한 상태를 인지하고 ‘성찰’의 당위성에 대해 동의하는 순간 삶은 너무 고단하고, 까다로워진다. 사고(思顧)는 길을 갔다 되돌아오기를 수 백 번 반복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을 의심 해야 하는 괴로운 순간들이 온다. 권력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은 당신이 서있는 삼차원의 권력 망 속에서의 당신의 위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자신이 누구 위에 딛고 서있는지, 어떤 전선에서 약자인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자, 자신의 이해관계와 분리해서 상황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대부분 우리는 스스로를 약자로 위치 짓고 피해자화(化)하면서 구조를 비판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는 능한 것 같다. 물론 충분히 소수자의 언어는 더 많이 발명되어야 하고, 발언들은 더 풍부해져야한다. 그러나 자신을 구성하는 수천 수만가지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 스스로가 사회적 약자이면서 동시에 기득권자 일 수 있고, 피해자 이지만 다른 전선에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저항은 대부분 무의식의 차원에서 강하게 일고, 밖으로는 이론과 논리로 정당화되어 발화된다.

권력은 한 인물이나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위계라는 구조의 산물이라고 배웠다. 이 권력의 매트릭스 안에서 당신도 역시 기득권자 일 수 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이성애자이고 대학졸업자이고 위계화된 지식과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서울에 살고 전라도 출신이 아니며, 남성이고 비장애인이라면, 당신은 그에 대입되는 항에서 충분히 기득권자이다. 문제가 되는 지점에서 자신은 이제 밖으로만 향했던 비판의 칼끝을 자신에게로 겨누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러한 스스로의 권력과 그로 인한 무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성찰하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있나.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오래 늘어놓았다. 왜 이런 수준의 당연한 판단들이 구체적 상황에서는 강제되지 못하는 걸까. 만약 운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약자/피해자/소수자로 규정짓는 것에만 능하고, 자신이 더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자기가 비판해왔던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권력화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도대체 모든 종류의 운동이 다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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