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2호 블로거TO블로거
삐딱이 철학도
intherye님 블로그(http://intherye.egloos.com)

모기불  
조회수: 3011 / 추천: 54
학부를 다니던 시절, 나도 이런 저런 글을 많이 끄적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저 낯뜨거울 뿐이다. 치기 가득한, 감정에만 치우친 글들을 써놓고선 혼자 감동먹기도 했고 얕은 지식과 몇권 안되는 독서를 얼기설기 엮은, 그저 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내용이라곤 없는 그런 글들을 마구 써갈기고선 혼자 뿌듯해하기도 했다.

모기불통신을 운영하면서 어지간히 이것저것 아는 체를 하고 있지만 절대로 아는 체 하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다. 학부를 다닐 때 철학수업도 듣고 나름대로 공부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철학이란 내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등장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그 이름들이 너무 어렵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짐작컨대 20대 중반이라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런 것까지! 할 정도로 세상일을 조근조근 짚어내는 통찰력있는 글을, 그것도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 게다가 그는 철학 전공이다. 철학블로그 decadence in the rye (http://intherye.egloos.com) 를 운영하는 intherye 님 이야기이다.

그가 쓰는 필명 intherye 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에서 따왔노라고 밝힌 적이 있다 (‘아이디와 블로그 이름에 대하여’). 그는 철학도답게 철학의 여러문제들을 통찰하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가령 ‘paradox’), 철학을 이용한 독창적인 농담들을 꾸준히 개발하기도 하고 (가령 ‘콰인화’) 철학사를 자기식으로 유쾌하게 정리해보기도 한다 (‘자세로 살펴보는 철학사’). 단순한 사례를 가지고 이러저러하게 가공해보는 지적유희를 즐긴다거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쓰는 방법 -사례 연구’), 아무도 신경쓸 것 같지 않은 단어의 어원에 몰두하기도 한다 (가령 ‘찌질’). 그는 독창적인 언어유희에도 열심인데 (가령 ‘러시아워’, ‘말장난’, ‘어록’ 등) 이것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잽이라면, 묵직한 스트레이트도 있다 (‘천만에요’, ‘특권’). 그는 은근히 삐딱이 노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 머리속의 지우개’, ‘투덜이 스머프 증후군’). 그는 짤막하고 위트있는 엽편을 쓰는 데에도 재능이 있는데 가령 ‘죽어가던 한 남자의 완성된 유언’ 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긴장감이 일품이다. 요즘 유행대로 마지막의 대반전도 있다.

삐딱이 노선을 즐기는 사람답게 그는 이것저것을 삐딱하게 바라보는데 가령 ‘내 여자라니까’ 라든가 ‘문화 사대주의’, 또 ‘나의 별자리는 처녀자리, 나의 혈액형은 A형’ 같은 글을 통해 우리는 삐딱한 것은 세상이고 그는 오히려 곧게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삐딱이가 된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해서 유년시절 및 성장과정의 트라우마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 및 ‘주소록.doc’ 그리고 이런 저런 글들에서 드러나는 편린들을 살피자면, 군대시절 정확히는 논산 훈련소시절 에 큰 정신적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인다 (가령 ‘우울증’).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군대와 관련한 것이 많은데 (가령 ‘솔직히 말해서 병역비리-’) 이 글들은 단순히 군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군대로 상징되는 이 사회의 경직성에 대한 분노와 야유이다 (카테고리 ‘군대 이야기’ 의 글들).

그가, 피가 펄펄 끓는 20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회의 경직성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다른 20대와 구별되는 지점은 그저 사회에 대해 한바탕 울화를 터뜨리거나 그저 이죽거리지 않고 뼈있는 야유속에 그가 가진 통찰력이 번득인다는 점이다 (가령 ‘소수자’). 그는 때로 우화를 통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령 ‘노몰로스 왕의 지혜’, ‘아이의 다짐’) 때로 직설적으로 내지르기도 한다 (‘성매매가 금지되어서는 안된다고? 빵을 사먹겠다고?’). 그 어떤 경우라 해도 그는 세상에 대해 차근차근 조근조근 잘근잘근 이의를 제기한다. 속삭이듯 논리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글을 읽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 와중에 얻어듣게 되는 이름들, 책의 제목들은 또 그대로 덤이다. 그는 때때로 남의 글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사유를 펴기도 하는데 (가령 내 글 ‘병아리에서 비롯한, 생명에 관한 단상’ 에서 비롯했다는 ‘생명, 고기. 채식?’) 내가 쓴 글이 남의 블로그에서 저렇게 훌륭하게 가공되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꽃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다. 그의 블로그의 여러 카테고리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 카테고리인데, 이 카테고리의 제목은 정말 ‘새빨간 거짓말’ 이다.

‘남자친구를 고르는 법’ 연작을 통해 그는 대단히 실용적이면서 대단히 깊이 있는 ‘남자친구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이 글들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남자친구의 이미지를 모두 더한 것이 그의 모습이라면, 그는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매력적인 사내임에 틀림없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글들에서 유추하건대 그는 아직 여자친구가 없는 듯하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그에게 멋진 여자친구가 생겨서 인생의 또 다른 면에 대한 그의 성찰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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