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2호 영화
모두가 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2002)

함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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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임을 모두가 안다면 어떨까. 의외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은행, 동사무소, 비행기 탑승 등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한 증명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내가 나임을 알 수 있다면, 일례로 단골 브랜드의 어떤 매장에서든 내가 단골임이 증명되고 나의 취향을 처음 보는 점원이 안다면 여러 가지로 나는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리기 쉬운 주민등록증을 귀찮게 휴대하지 않고도 관공서에서 내가 나임을 모두가 알면 고개만 빳빳이 들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꽤 매력적일 것 같다, 모두가 내가 나임을 안다는 것은. 굳이 미디어의 스타가 아니어도 내가 나임을 모두가 안다면 나의 일상생활은 편리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모두가 내가 나임을 아는 것이 나에게 불편함 없는 일상을 만들어 주고 만족감을 안겨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답게 화려하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답게 견고한 연출을 보여준다. 영화는 2054년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예지자가 범죄-살인을 예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전에 살인 예정자를 체포한다. 존은 이 범죄예방국의 팀장인데 6년 전, 범죄예방국이 생기기 전에 유괴 살인으로 아들을 잃었다. 그런 그가 살인을 할 것이라는 예지자들의 예견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게 위해 도망을 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알게 되고 그 배후를 쫓는다.

영화는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기에 많은 미래적 테크놀로지가 등장한다. 간결한 모양의 컴퓨터를 키보드나 마우스를 움직이지 않고도 영상이나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매연 그득한 휘발유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 조정되는 깨끗한 자기 자동차가 벽을 타고 다닌다. 말소리로 집안의 전등을 조작한다. 그런데 이런 첨단 기술의 발전이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모습들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면 <스타워즈>에서 홀로그램 영상이 그 당시에 관객에게 주었던 신기함만큼은 아니다. 이미 많은 SF영화를 통해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기술들이 막연하게나마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보여주는 미래는 섬뜩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신화적인 절대자 같은 예지자가 기술과 결합해 미래를 예측하고 예측된 범행자를 체포하는 절대적 통제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 섬뜩함은 익명의 군중이 존재할 수 없는 기술의 이용을 시각화했다는 데에 있다.

존이 살인 예정자로 쫓기게 되었을 때, 영화 속 미래 사회의 편리한 듯한 테크놀로지는 효율적인 범인 추적에 기여한다. 자동 조정되는 미래 차는 존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찰서로 향한다. 그래서 전형적인 쫓고 쫓기는 자동차씬이 아니라 자동차를 탈출하는 씬이 등장한다. 또한 모두가 존이 존임을 안다. 미디어를 통해 수배자의 얼굴이 공개되고 사진이 온 거리에 붙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의 각막을 읽어 내는 각막 인식 장치가 도심 곳곳에 보안 카메라처럼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치가 활용되는 전자 광고판은 자본의 효과적인 광고를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댄다. 이름이 불리고 싶지 않은 존의 이름을 광고판은 시끄럽게 불러댄다. 게다가 그것은 쫓기는 존의 위치를 알려준다. 수배자를 찾기 위한 검문은 스파이더라는 작은 벌레 같은 기계가 온 건물을 마구잡이로 들어가 사람들을 확인한다. 그들이 화장실에 있건, 섹스를 하건, 싸움을 하던 강제적으로 각막을 읽어내 신분을 알아낸다. 이처럼 미래를 특징짓는 이 몇 장면들 속에 개인은 무리 속에 불특정하게 있을 수 없는 사회를 보여준다. 보통 때는 눈치 챌 수 없던, 게다가 개인에게 편리함까지 주었던 테크놀로지가 신속하게 개인을 감시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미래가 섬뜩하다. 내가 나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체제 안에서 통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성과 편리성으로 개발되고 발전한 기술은 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한 감시와 통제로 이용된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작은 안락함을 누리는 대신 인권도 사생활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내가 나임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알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익명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단순히 미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영화적 ‘공상’도 아니기에 더욱 서늘하다. 현재 우리나라 모든 국민의 열 손가락의 지문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온 국민의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가 통제하려고 들 것이다. 그 효율성을 들면서 말이다. 재난으로 실종된 가족을 찾는데, 지문과 유전자정보가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폭력적인 논리를 지지하는데 오용된다. 또한 이미 보안용으로 실현되고 있는 각막 인식은 영화에서처럼 잃어버리기 쉬운 신분증이나 신용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용도로 이용될지도 모른다. 현실화되면 굳이 지갑을 챙겨들지 않아도 불편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하루 일과가 나도 모르게 기록으로 남는다면 지갑 없이 다니는 게 과연 편하기만 할까.

스필버그는 늘 그렇듯 안전한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비극적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비관적 미래를 목격한다. 영화가 보여준 미래 사회에는 편리함으로 가장한 기능적 통제를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도 없다. 미래 사회의 암울함이나 비관적인 면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였던 기능적 신분 통제는 미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아직 기술적 발전이 영화처럼 구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개인의 등록화는 이미 틀이 잡혀있으며 또한 그 기술의 일부가 긍정적으로 활용되고 있기에 현재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져가고 있다. 모두가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무신경해진다. 비록 영화는 인간의 자유 의지 선택을 중시했지만, 영화가 시각화한 미래는 인간이 군중 속의 익명을 선택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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