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2호 북마크
후기자본주의 해부
미셸 푸코,「자기의 테크놀로지」

이규원  
조회수: 4198 / 추천: 72
최근에 둣치오 뜨롬바도리와 미셸 푸코의 대담집인 「푸코의 맑스」가 번역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지금 시대에 미셸 푸코라니? 아직까지 그를 읽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물론 90년대 한국에서 그는 스타지식인이자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찾아온 비판이론의 공황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돌풍과 함께, 그는 위대한 ‘광기와 감금의 사상가’이자 ‘권력의 미시물리학자’로서 한국에 왔다. 그러나 포스트주의의 열기가 차츰 시들해지면서 그도 끊임없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만약 권력이 편재화되어 있고, 심지어 권력이 주체를 생산한다면(또는 억압이기는커녕 생산하는 권력이라면) 우리는 저항의 지점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저항은 아예 권력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역시 이러한 난점에 부딪혀 후기에는 자아의 윤리학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이는 푸코에 대한 가장 통속화된 버전의 비판이며,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라는 컨텍스트로 그를 전유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말년의 푸코의 작업은 이것과 전혀 상관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는 후기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틀을 남겨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의 테크놀로지」에서 개략적인 스케치를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자본주의가 갖는 수많은 이름들-정보화사회, 탈산업사회, 네트워크경제 혹은 신경제, 지식정보자본주의-은 각기의 함의와 상관없이 현재적인 자본주의가 이전의 산업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대표적으로 지식혁명의 전도사인 피터 드러커는 후기자본주의는 산업경제에서 지식기반 경제로 구조전환을 통해 이행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종종 지식정보자본주의와 신경제담론을 통해 듣려오는 목소리들은 이런 것들이다 - 이 시대의 노동자는 더 이상 ‘육체적’ 노동으로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동일하게 규격화되고 같은 업무과정를 반복하는 숙달된 산업노동자가 아니다. 이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지식’과 ‘정보’이며,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지식노동자’와 ‘신지식인’이야 말로 현대의 노동자이다. 그러므로 지식노동자는 다양하고 복잡하며 급속도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지식’과 ‘정보’를 사용하여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노동자이며,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하고 혁신하여야 한다.

우리는 IT산업 종사자들에게서 이러한 지식노동자의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고도의 테크놀로지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기술습득을 통해 자신을 혁신하는,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지식노동자이자 프리랜서. 그러나 현실적으로 IT산업의 스타는 극히 소수이며 그 외의 많은 노동자들은 고강도노동과 불안정한 고용구조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정체성을 이러한 지식노동자 담론들을 통해 서사화하고, 새로운 기술을 향한 끊임없는 자기혁신과 시간관리에 몰두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지식정보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세련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푸코가 이지점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식노동, 평생학습, 연수, 자기계발 및 혁신, 창조력의 이름으로 국가정책, 경영시스템, 임금체계를 통해 후기자본주의가 실행되는 권력에 대한 분석이고 그것이 억압적 ‘구조’가 아니라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더 이상 병원, 감옥, 학교와 같은 근대적 기구들이 지식-권력을 통해 균일하게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지배의 테크놀로지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주체로서 ‘자신’이 발명되는 것이다. 유연전문화의 시대에 자율적으로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을 계속적으로 혁신하며 창조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처럼 들리며, 획일적인 노동에 대한 ‘해방’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식정보자본주의가 생산해내고 요구하는 새로운 노동주체성의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며, 지식에 의해 대상으로 규정된 인간이 자신을 관리하는 방식 자체가 권력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저항의 형태를 그려볼 수 있을까? 들뢰즈의 말처럼 “뱀의 고리들은 두더지굴의 구멍들보다 훨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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