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2호 만화뒤집기
내지(內地)의 불운한 크럼과 만화가의 책무
로버트 크럼 <아메리카>, 김제민 옮김, 김수박 글씨, 새만화책

김태권  
조회수: 3511 / 추천: 67
“사람들은 젊은 시절엔 애처로울 만큼 희망차고 긍정적이지만, 나이가 들어 좀 더 ‘성숙’해지면 인생의 ‘잔혹한 현실이 묻어나는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늙고 비참해지면, 부서진 꿈들에 후회막급일 뿐이다!” 로버트 크럼이 보는 인생의 세 단계이다. 변하지 않는 인생과, 변함없는 ‘아메리카’에, 짓눌린 게다.

로버트 크럼. 1943년 출생. 한참 ‘냉전이 뜨겁던 시절’, 별로 즐겁지 않은 유년기를 보낸다. 60년대 후반, 부박하디 부박한 ‘미국식 저항’이 한창일 때, 그는 팔팔한 20대였다. 크럼의 그림을 보통 편집증적이라고들 하는데, 이 시대의 유행과 잘도 맞아 떨어졌다. 크럼은 시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때 유행한 낱말들 : LSD · 언더그라운드 · 히피. 그러나 의식도 조직도 받쳐주지 않을 때, 투쟁은 일탈로 그친다. 시대정신은커녕, 유행만 있을 뿐. 미국이란 천박한 과두정 국가는, 흑인 ‘투쟁’에는 피에 굶주린 몽둥이를 휘두르고, 백인 ‘일탈’에는 시장 한 귀퉁이를 분양했다.

언더그라운드라는 새로운 시장. 대부분 백인이 보기에, 사회는 변할 만큼 변했다! 이제 언더그라운드도 비싸게 팔리지 않는가? - 그래! 심지어 해외수출까지 하지 않는가? 척박한 식민지 한국 땅. 메탈이니 뭐니 내지(內地) 언더그라운드를 따라가지 못하던, 삐딱한 센징(鮮人)은 바보취급을 받아야 했다(세상에, 미국 언더그라운드의 지배는 식민지 한국인에게 ‘축복’이라도 됐단 말인가?). 아무튼 백인들에겐, 이걸로 충분했다. 됐다. 이제 싸움은 쉬고 밥벌이를 하자. 젊은 백인들은 어차피 사회를 허물었다 다시 지을 생각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크럼의 만화는 이 정도로 그칠 건 아니었다. 아무리 언더그라운드가 제법 팔린다곤 해도, 문혁(文革)을 빗대어 “미국 상류계층 사람들을 데려다가 한두 해 정도 여름철 뙤약볕 아래에서 밭을 갈게 만들겠다”고 떠드는 풍자가를 받아줄 시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썩은 접싯물처럼 일천한 그 사회에, 그가 갈만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생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 크럼(그가 유럽으로 향한 것은 훗날의 일이다)이 투철한 의식으로 무장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만화를 접기에, 크럼은 너무 열심히, 치열하게 그린다(크럼의 스케치북은 유명하다). 그럼 어떻게?

크럼은 그의 만화를 들고 신성한 예술의 영역으로 튀었다. 더 완성도 있게, 더 독창적이게. 그리고 더욱 신랄한 풍자. 그의 작품집 <아메리카>는, 과연 소장가치가 있다. <아메리카>를 낸 출판사 ‘새만화책’은 매우 열심히 책을 만들었고, 크럼의 그림을 살리기 위해 식자도 특별히 손글씨로 했다(이런 책은 제꺽 사주어야 출판사가 힘을 받으리라 - 참고로 필자와 이 출판사는 옷깃 한 번 스친 인연도 없다). 크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좀 늦은 감도 있다. 이제 그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아티스트’니까.

그러나 크럼의 세계에, 아방가르드는 있지만, 소통은 있는가? 그의 만화는 한 마디로, 너무 주관적이다. 지나친 주관성은,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미덕일지 몰라도,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악덕이다. 운동이 아닌 예술로 간 크럼. 그의 만화는 산만하고, 메시지는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반복할 따름. 그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발전한 시스템이 아니라, 단지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사는 옛날의 아메리카인 듯하다.

이 모두가, 맑스가 아니라 소로우를 연상시킨다. 맑스는 어떤 사람이었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의 주장 이후, 격렬한 논쟁과 조직화된 실천이 요구되었으며, 그것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럼 소로우는? 소로우 이후에는 몇몇의 도덕군자 개인이 있을 뿐이다. 조직 대신 소수의 보헤미안. 대안을 위한 의식 대신 부정을 위한 혐오. 소수의 불평불만. 거대담론을 회피하고 현상분석에만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은, 실천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만 하려는 우리사회 윤똑똑이들과도 닮아 보인다. 하기야, 이 모두 內地에서 심어주신 라이프스타일이렷다!

그렇다면 이제 자본주의는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단지 아주 조금, 눈살만 찌푸리면 된다. 아니, 가끔은, 소수 아방가르드를 키워주는 것도 괜찮겠다. 예술이라, 멋있는 일. 이러다보니, 보헤미안은 좋고 조직가는 나쁘다는, 체는 좋다면서도 카스트로는 싫다는, 한 사람 유나바머는 순교자로 만들지만 단체 행동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내다버리는, 제 앞뒤조차 맞추지 못하는, 한심하고 천박한 미국 문화. 풍자는 허용되지만 선동은, 다만, 아무 대답 없이 허공에 울려 퍼질 때에만, 용서받는다. 저런 답답한 미국 사회에서, 크럼이 이런 예술적 성취를 하다니, 박수 받을 일이긴 하다. 더러운 쓰레기통 ‘아메리카’에 피어오른 한 떨기 장미 ‘크럼’.

그러나 필자는 크럼의 본격적인 작품집 <아메리카>보다, 그가 그린 <카프카>가 되레 좋았다. <카프카>는 지식만화였고, 우리에게 카프카의 생애와 문학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아메리카>가 <카프카>보다 예술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프카>에는 <아메리카>에 없는 것, 즉 소통이 있다. 중요한 것은 소통, 그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 크럼은, 소통을 포기하다시피 한 채, 자신만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크럼의 일. 하기야, 미국 같은 사회에 갇혔던 이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잔인한 일이리라.

그러나 필자는 한국사회를 잠시 생각한다. 크럼의 예술적 성취를 배우는 일은 좋다. 그러나 만화가가 한국사회에서 소통을 포기할 이유가 있을까? 정정이 불안한 이곳 반도에선 과두정체인 내지보다 훨씬 더 많은 인민들이, 공적인 일(라틴어 res publica - 공화국republic의 어원이 되었다)에 ‘참람되이’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 좌익은 역사적 경험이 짧아서 그런지 아메리카 좌익보다 활동적인 사람이 많고, 딱 그런 만큼만 건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도 우익은 내지 우익보다도 더욱 저열하고 비천하여, 모든 비문맹자의 비웃음을 산다. 그렇다! 요즘 여기서는, 건설적인 발언이 사회에 먹힐 여지도 있고, 운이 좋으면 토론조차 가능하다! 이런 금쪽같은 기회에, 만화 같은 절호의 무기를 든 채, 무엇하러 소통의 기회를 버리겠는가? 다만 눈앞의 광명으로 매진할 따름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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