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3호 블로거TO블로거
세상은 이미 보는 이의 시각에서 재현된 것
개울님의 블로그 re-presentation (http://myeyes.egloos.com)

inther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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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신문에 자기는 여성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데도 어째서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총여학생회에 회비를 내야 하느냐고 성토하는 남학생들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었다. 또한 남학생들도 똑같이 총여학생회를 금전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어째서 남학생에게는 여학생회 피선거권이나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다. 확실히 물어볼만한 질문이었다. 얼마 전 그에 답하는 여학생회측의 해명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내가 읽기에 그 ‘해명’은 정작 제기된 의문에 대한 해명은 하지 않고, 여성주의의 당위성을 반복하며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남자들을 탓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해명’에 대해 그 ‘몰지각한 남자들’로부터 되돌아올 반응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피상적 관심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고, 제한된 지면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이러한 종류의 의사소통은 이처럼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인, 소모적인 것이 되기 쉽다. 더군다나 이해관계가 얽힌 다양한 주체들의 온갖 잡음이 끼어드는 상황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나보다 더 답답했던 것은 오히려 그 지겨운 문구를 또다시 주문처럼 되뇌어야 했던 여학생회가 아니었을까.

블로그를 통한 의사소통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내용 면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기술적으로는 가상공간의 열린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블로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은 어떤 거대한 역사적 이념 같은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일상과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서랍 속의 일기장과는 달리 누구나 부담없이 쉽게 다가가서는 죄책감 없이(!) 들춰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개울님의 블로그 re-presentation (http://myeyes.egloos.com)의 경우, 이러한 특징은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이 블로그에서는 개인의 눈을 통한 여성주의를 접할 수 있다. 첫 화면에는 "나의 시각, 당신의 시각... 세상은 이미 보는 이의 시각에서 재현된 것."이라고 써 있다. 아마도 블로그 이름 re-presentation(재현)과 고유 주소 myeyes는 개울님의 이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여성주의와 관련한 식상한 슬로건 따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하철 개찰구에 전화카드를 넣으려고 애쓰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변기에 지갑을 빠트리고, 빙판길에서 잘 넘어지며, 할일 제때 안 하고 땡땡이쳤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하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서 얻는 것은 그와 같은 개울님의 개인적 매력만이 아니다. 초경 때의 난감한 일화, <달거리와 달거리대에 얽힌 추억>을 통해 수박 겉핥기식 성교육의 폐해에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되고, 집안일을 둘러싼 가족 간의 다툼 이야기를 읽고는 우리집의 권력구조는 어떠한가 되돌아보게 된다. 대안 달거리대 체험 글들을 통해, 대안 달거리는 어떤 취향 고약한 여자들의 키취가 아닌가 의심되는 게 아니라, 정말 하나의 쓸만한 대안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하루하루의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여성주의는 이미 남이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라면, 아무리 심약한 예비 마초라도 아마존에 잘못 들어서기라도 한 것 마냥 주눅들어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여성주의를 느껴보시라. 개울님의 이야기는 여느 신문이나 잡지의 기다란 전문 기사보다도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처음부터 낯선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혼자 기웃거리면서 소외감 느낄 필요도 없다. 이러한 생생함은 개울님께서 여성주의의 어떤 대표나 대변인 같은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이겠다. 어떤 집단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크기는 할테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명하지가 않아서 오히려 듣는이의 가슴에 와닿기가 어렵다. 깔끔하게 인쇄되어 살포되는 전단지와 손으로 써서 부친 편지 사이에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지 않던가.

개울님의 블로그를 통해 접하게 되는 여성주의 관련 링크나 소식, 또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개울님의 감상들('문화생활'로 분류되어 있다.)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운 덤이다. 며칠 전에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자기 친구에게 "내 친구 중에는 과고랑 외고 다니는 애도 있고, 인문계 다니는 애도 있어. 나는 친구가 정말 다양한 것 같아."라며 자랑하는 것을 듣고는 혼자 낄낄대다가, 이내 나 역시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무룩해진 적이 있다. 개울님 블로그에서 얻어오는 덤들은 이렇게 시무룩해진 기분의 전환에도 직효다.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랄까.

인터넷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들 하건만, 어째 블로거들 중 여성의 비율은 이상하게도 상당히 적은 것 같다. 없는 것인지, 숨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못 찾고 있는 것일 뿐인지. 그런 점에서 개울님의 블로그에서 알게 된, 일단의 블로거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 'sheblogs(가칭) 프로젝트'에도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언뜻 훔쳐보니 아마도 여성 블로거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주는 일종의 메타블로그가 될 듯하다. 조만간 실현된다면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쉽고 편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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