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3호 영화
소박한 기적-기다림
깃 (송일곤, 2004)

함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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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약속이 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우도로 들어선다. 송일곤 감독의 <깃>은 환경영화제 프로젝트로 만든 영화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완전히 어긋난다. 첫사랑과 추억 그리고 새로운 사랑에 대한 풍경이 우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펼쳐진다.

변변치 않은 영화를 끝낸 현성은 5월 광주에 대한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중 10년 전 첫사랑과의 약속이 생각나, 우도로 들어간다. 처음 우도에 왔을 때 그와 그의 첫사랑은 10년 후 같은 모텔에서 만나자고 했다. 10년 후 리모델링이 된 모텔에는 삼촌을 도와 모텔 일을 하는 재수생 소연, 그리고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며 바다와 들판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소연의 삼촌이 있다.

디지털이 이젠 더 이상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되어버린 시대에 송일곤 감독은 디지털 카메라로 아날로그적 추억을 그려낸다. 속도가 당연시 된 일상에서, 그리고 직선적 미래의 시간을 향해가야 하는 우리의 일상에서 <깃>은 천천히 과거로 되돌아간다. 핸드폰,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와 인터넷이 짧은 시간 안에 첨단 신기술에서 급속도로 평범해진 문화가 되었다. 아니, 생활이 되었다. 현성도 원고지가 아니라 노트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디카로 자신의 얼굴을 찍는다. 하지만 그는 1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추억하기 위해 미니홈피에서 사람 찾기 보다는 별세계 같은 우도에 들어선다. 날씨가 궂으면 발이 묶이는 섬에서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사람들을 만나고, 기다린다. 속도가 제의미를 발휘하지 못하는 곳-우도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듯 추억을 더듬고 약속에 설레고 새로운 사랑과 마주한다.

<깃>은 상처와 치유에 관한 영화이다. 독일로 유학 가서 독일 남자와 결혼한 첫사랑 때문에 월드컵에서 독일을 응원하지 않는 상처-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극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상처는 누구나 한가지쯤 가지고 있는 상처이다. 이것을 속도 전쟁이 난무한 디지털 시대에서 기다림으로 느리게 치유한다. 이러한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바로 1시간 뒤로 약속을 잡을 수 있는 핸드폰과 인터넷 덕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없다는 소리에 한숨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며칠씩 걸리는 편지를 주고받고 설레는 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 이야기가 되었다. 기다림 속의 교차되는 감정은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서 기다림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다. 영화는 이렇게 옛일이 되어가는 것들을 화면 가득 소리 없이 펼쳐 보인다. 약속을 기억한 첫사랑의 편지로 독일을 응원하기로 마음을 잡은 현성은 다시 1년 뒤 약속으로 소박한 기적을 꿈꾸게 된다. 몇 년 뒤에 다리 위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이젠 기적 같은 일이다. 선전 문구처럼 ‘네트워크로 하나 되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이 아날로그적 영화는 관객의 낭만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오랜만에 소박한 낭만을 만날 수 있는 영화이다. 기술의 집약을 보여주는 화려한 영화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만나는 모습도 자극적으로 되어버리고,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동창을 찾고, 첫사랑을 몰래 찾아보는 요즘의 풍경 속에서 소중한 영화다. 분신처럼 가까이 하는 기계와 기술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깃>은 그 기억을 ‘지금’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10년 전쯤처럼 약속에 늦는 사람을 기다리던 일을 문득 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요즘의 기다림은 그때의 기다림과 다르다. 왜 약속에 늦는지 얼마나 늦는지 즉각적으로 통화할 수 있기 때문에 전화기를 들고 다닐 수 없던 시절처럼 기다릴 수는 없다. 숨차게 변화는 세상에서 기다림의 미덕을 그립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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