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3호 만화뒤집기
젊은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
데릭 커크 김, 「다르면서 같은」

김태권  
조회수: 3736 / 추천: 65
이 만화 「다르면서 같은」에서는, 성장통을 다룬다. 비장미 철철 넘치는 거창한 성장통이 아닌, 일상의 보편된 성장통을 그린다는 점에서, 되레 이 만화는 대단한 것이다.

사실, 평범한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더 감동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평범한 모습이야말로 가장 그리기 어렵다. 옛말에도 도깨비나 귀신은 오히려 그리기 쉽거니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집짐승이 그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한비자). 일상적인 것은, 조금이라도 틀리면 주위 사람들이 금세 알아차리는 까닭이다. 재미를 잃지 않고도,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그려내는 것. 그것이 실로 어렵고 대단한 일이다.

이 만화는 그 ‘평범해서 대단한’ 과업을 꽤나 솜씨 있게 이루어낸다. 탄탄한 그림, 빨아들이는 스토리, 잘 짜여진 컷 구성. 여간 갈고 닦은 공력이 아니다. 만화장이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그 ‘비범한’ 실력으로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데 성공하였다.

일상성의 강조를 위하여 인물의 옷과 배경은 매우 사실적이다. 이에 비해 인물의 얼굴은 다소 층위가 있다.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다룬 이 만화의 경우 인물의 얼굴은 꽤 정제되어 있다. 인종적 특징을 제외하면, 단순해 보일 정도로. 이와는 달리, 작가 스스로의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반영된 책 뒤편의 단편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극히 사실적인 얼굴을 하고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콧 맥클라우드에 의하면 만화 인물의 이목구비가 단순할수록 그 캐릭터는 더욱 큰 보편성, 더욱 넓은 대표성을 획득한다고 한다(만화의 이해UC). 「다르면서 같은」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 가설을 입증하고 있을까? 글쎄, 그런 것도 같고, 꼭 그렇지는 않은 것도 같고.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문제이다.

한편, 또 하나 눈에 띠는 특징은 연속된 컷의 이용이다. 비슷한 크기의 컷에 비슷한 그림 여러 장을 병치하는 방식. 영화의 ‘롱 테이크’를 보는 듯한 효과를 내었던 일전에 다룬 야손의 「헤이 웨잇」은 이 기법으로 큰 재미를 봤다.

이 책에도 매우 인상적으로 이용된다. 수록된 단편 「풀링」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잡아 뽑으려고 아무리 힘을 줘도 뽑히지 않던 잡초가, 절로 맥없이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연속된 여섯 컷으로 ‘슬며시’ 넘어지는 잡초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장면, 매우 큰 감동을 준다. 여섯 컷이 흐르면서 잡초가 쓰러지듯, 마음의 잡초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쓰러질 것이다. 잡아 뽑으려고 힘을 줘도 당장은 낫지 않지만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치료되는 것인지, 잊혀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장통은 아무튼 나아질 것이다.

성장통이란 무엇인가? 젊음의 고통은 무엇인가? 젊음이란? 젊음은 좋은 시절, 그러나 짧다. 젊을 때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뭔가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너무 짧아서, 그래서 슬프다.

짧은 젊음 - 그 동안 뭐라도 하나 이루려고 발버둥쳐야 하나? 소년은 쉬이 늙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少年易老學難成) 더 열심히 공부할까? 아니면 화무는 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더 열심히 놀아야할까(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극단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의견 모두 솔깃하다니 기이한 일이다. 어느 쪽도 뾰족한 답이 아니라서 그러할 터.

그러나 또한 젊은 시절의 아픔은 금세 지나간다. 젊음은 짧다는 점에서, 고통은 빨리 잊혀진다. 시간은 그 고통을 해결해준다.

요컨대 그 아름다움 덕에 젊음은 기쁨이다. 그러나 그 기쁨이 너무 짧기에 젊음은 또한 슬픔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젊음은 또한 슬픔에 머무르지 않는다.

속되고 어설픈 변증법이라고나 할는지, 아무튼 젊음은 이렇게나 애매하다. 그런데 어찌된 우연인지, 이러한 애매함은 저자의 처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저자는 젊고,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계 미국인의 위치는 애매하다. ‘다르면서 같은’ 곳곳에서, 작가는 이 점을 언뜻언뜻, 그러나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무관심과 중국인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에 시달린다. 그의 애매한 위치는 떨리고 있다. 미국에서 그는 편안치 않을 것 같다.

그럼 한국에서는? 한국어를 잘 못한다고? 그럼 영어 강사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것도 유색인종 영어 강사. 만화에도 나오다시피, 백인 대접은 결코 받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백인을 동경하지만, 유색인종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다. 제국주의만도 못한 아제국주의, 오리엔탈리즘만도 못한 아(亞)오리엔탈리즘이다(오수연).

이것도 다만 한때 지나가는 성장통이기를, 한때의 낯 뜨거운 과오이기를.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사회가 오늘날의 이런 모습을 부끄럽게 회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똘레랑스를 갖춘 사회로 성장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과오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먼 길을 더 가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풀링’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잡초는 잡아 뽑는다고 당장 뽑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애초에 잡아당기던 손이 없었다면 아무리 시간이 흐른들 잡초가 저절로 쓰러지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싸울 도리 밖에는 없다. 우리에게는 섣부른 희망도 금지되어 있고, 그렇다고 절망할 권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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