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4호 과학에세이
비둘기에게 미안하다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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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하순에 일본에서 107명이 죽고 547명 이상이 다친 열차 탈선사고가 있었다. 날마다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나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조사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사고의 직접 원인은 과속이라고 했다. 앞의 역에서 정시보다 1분 30초 늦게 출발한 잘못을 다음 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만회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기관사는 이미 죽었지만, 그가 일년 전에 단체소풍을 가는 초등학생을 태우다가 다음 역 도착이 10초 늦어진 일에 대한 책임으로 19차례에 걸쳐 원고지 30매 이상의 반성문을 썼다는 것까지 뒤늦게 보도되었다.

일본철도인 JR은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정시운행 위반을 할 경우 철저한 재교육과 보너스 삭감 등 엄한 처벌을 받게 되므로 이로 인한 심리적 중압감이 무모한 운전으로 연결됐다는 분석이다. 과열경쟁이 열차의 제한속도를 높이거나 운행 대수를 늘리는데 집중되었고, 그 결과 통근시간대에는 불과 2~3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과밀운행시간표에 시달리게 되어 안전관리체계에 결함이 생겼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일본의 철도연장은 우리나라보다 약 8.6배, 여객수송은 약 133배인데 비해 사고건수는 우리의 절반에 불과할 정도로 철도안전에 대한 연구와 대비를 잘했다고 평가되었지만, 구조화된 경쟁과 이윤지상주의는 대형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나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이러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기관사가 감당했을 직무스트레스의 천근만근 무게이다. 직무스트레스는 ‘노동환경이 노동자가 지닌 능력이나 기대, 요구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해로운 반응’으로 정의하자. 그것은 뇌심혈관계 질환, 소화기계 질환, 정신질환, 근골격계 질환 등의 각종 질환과 직무만족도 하락, 결근, 이직 등의 행동 반응을 초래한다. 미국에서는 40%의 노동자가 심한 직무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유럽연합(EU)에서는 작업관련 손실일수의 50~60%가 스트레스와 관련된 것이며, 일본은 직무스트레스가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 비율이 82년 50.6%에서 2002년 61.5%로 증가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최근 조사에서 노동자의 81.7%(2,083명중)가 ‘직무스트레스로 인해 질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고, 또 다른 조사에서는 노동자의 93.7%(921명중)가 직무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44.8%는 그로 인해 회사를 그만둔 경험까지 있었다. 어느 지하철 기관사는 어두운 지하에 버려진 신문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오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했다. 지하철 운행 중에 끔찍한 사고라도 겪으면 후유증이 급기야 공황장애(지독한 공포나 불안상태의 일시적 발작현상)라는 정신질환에 이르는데, 그 중 극히 일부만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았다.

이렇듯 노동자의 건강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도 버겁고 힘겨운 나라. 무사고 기록을 세운 어느 기관사가 달리는 고속열차의 차창에 부딪혀 죽은 숱한 ‘비둘기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접했을 때, 나는 우울하고 답답했다. 원시적 대형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채 무한경쟁과 구조조정의 레일위로 빨려 들어가는 이 땅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은 어쩌면 비둘기의 그것만도 못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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