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4호 사이버
페미니즘 캠프의 추억
서로에게 약이 되고 힘이 되는 여성들의 에너지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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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때는 꽃피고 새 우는 4월. 2004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언니네(www.unninet.co.kr) 운영위원 몇 명은 역사적인 영화에 필이 꽂히고 만다. 수많은 흑백 자료화면과 L언니들의 인터뷰로 꾸며진 영화 ‘급진적 하모니’는 1970, 8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음악문화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전역에서 찾아온 여성들이 모여 1주일씩 천막을 치고 치렀다는 여성음악축제인데 영화 중 특별히 더 꽂힌 부분이 이것이었다. 페스티벌에 다녀와서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감동스럽게 얘기하는 인터뷰이들은 더 이상 우리를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 영화를 보고 난 몇 사람들은 곧 97년 페미니즘 캠프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당시 수도권 대학들의 여성운동단위 모임이었던 ‘들꽃모임’에서 주최해 약 70여명의 여자들과 함께 다녀온 이 캠프는 내가 평생 페미니스트로 살리라 맘먹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들꽃모임 자체가 그간 없었던 새로운 여성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을 기조로 삼고 있었던 곳이라, 캠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보고 싶었던 것에 대한 시도로 이루어졌다. 모든 참가자들이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즐겁게 놀 수 있는가’에만 집중했고, 몸으로 뛰어 놀기, 분임토론, 한밤의 위령제등 준비한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의 눈부신 재주와 아이디어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그녀들이 쏟아낸 놀라운 에너지는 97년 8월 낙산의 바다를 해방구로 기억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7년이 지나 열린 2004 언니네 페미니즘 캠프 ‘여름엔 역시 수박이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게 된다. 다양한 나이와 다양한 정체성의, 그야말로 백가지 색깔을 가진 여성들이 모여 있는 언니네에서 주최한 것이라, 역시 참가자들의 모양새도 백양백색이었다. 이번 캠프는 각자 다른 포지션의 여성들이 서로에게 눈을 맞춰가며 각자의 에너지를 채워가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사이버에서만 보아왔던 아이디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서로 살아 숨쉬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신기했고, 또한 참가자들 모두 식사준비나 청소 같은 궂은일에 우르르 몰려들어 팔을 걷어 부치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별거 아닌 프로그램도 순식간에 아트로 만들어버리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며, 온몸을 던져 게임에 임하는 막가파 정신의 소유자들. 그녀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나의 굳은 마음은 야들야들해졌다. 여성들이 만든 영화를 같이 보고, 여성들이 만들고 부르고 연주하는 노래를 같이 즐기는 것, 그것들을 함께 하자 영화는 더 재밌고, 공연은 더 흥겨웠으며 열광에 열광의 광장이 되었다.


캠프 날짜가 다가올수록 언니네 사이트는 들썩이기 시작했다. 언니네 질문답변코너인 ‘지식놀이터’에는 캠프를 갈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부터 캠프 짐을 어떻게 싸면 좋을지 물어보는 사람, 일정이 안되어 캠프를 못 가게 되었는데 이 허전함을 어떻게 달래면 좋을지 묻는 사람들까지. 캠프에 대한 이야기들로 언니네는 소풍전야의 볼 빨간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사이트는 캠프가 끝난 이후 더 뜨거워졌다. 캠프 때 만났던 사람들의 자기만의 방(개인 블로그)에 들러 인사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지식놀이터(질문답변코너)에는 캠프 후유증으로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고민이 올라오고, 캠프 후기가 올라간 자기만의 방에는 스크롤 압박이 상당할 만큼의 꼬리말이 줄지어 올라왔다. 캠프 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구에 캠프 참가자모임 커뮤니티에서는 참가자 뒷풀이에 대한 얘기들이 피어나고, 두 번에 걸친 거나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언니네에서는 캠프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모였고, 특히 공연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모여 ‘Womyn In Music’이라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음악 스터디를 진행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주의 행사들 중에서도 특별히 캠프를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여성들만 모이면 뭔가 재밌고 신나는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신경 쓰이고 불편하고 거슬리는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고, 이런 상태에서 여성들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린 자세가 되곤 한다. 이런 자세로 그야말로 거침없이 즐기는 여성들이 분출하는 에너지는 서로에게 약이 되고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
2004년 언니네 캠프에 참가했던 친구는 뒤풀이에 와서 이런 얘길 했다.

"캠프에서 돌아가 집에 있는데,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꿈만 같던 곳에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어."

그래. 꿈 같은 일이었다.

올해도 언니네는 8월에 갈 캠프를 준비하고 있다. 수영장이 딸린 캠프장소를 보고 열광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보면 캠프 때 할 생각에 좋아하며 캠프를 기다린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 올해 언니네 페미니즘 캠프는 8월 12일 ~ 15일 3박 4일간 충북 괴산의 이대 수련관에서 열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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