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호 이동영의
복제는 디지탈의 본질이다
디지탈 콘텐츠 관리의 한계

이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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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탈 기술이 발전함에 많은 정보, 즉 콘텐츠들이 디지털화 되고 있다. CD가 LP 음반, DVD가 비디오를 대신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디지탈 기술이 아날로그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비손실성'이다. 시간이 지나거나 여러 번 사용하고 복사하여도 원본과 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좋은 품질을 원하는 사용자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콘텐츠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압축 기술의 발전(MP3, DivX)과 집집마다 보급되는 고속 네트워크는 콘텐츠의 복제와 배포를 더욱 쉽게 한다.
저작물(콘텐츠)에 대한 권리를 어느 정도로 인정해야 하는지는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CD 1장을 사서 보관용으로 복사하는 것, 집에서도 듣고 사무실에서도 듣기 위해 복사하는 것, 복사해서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 MP3 파일로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것, 남이 올린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듣는 것,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허용되고 어느 것이 허용되지 않는지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술자의 입장에서 명백한 것은 디지탈 기술이 근본적으로 복제를 막을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즉 디지탈 시대에서는 복제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은 지나간 시대의 유습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암호화의 한계

디지탈 콘텐츠 관리(DRM, Digital Rights Management)란 디지탈 콘텐츠를 보호하려는 기술적인 노력을 말한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지는데, 콘텐츠를 암호화해서 복사할 수 없도록(혹은 복사해도 사용할 수 없도록)하는 방법과, 콘텐츠에 표식을 붙여서 저작권을 표시하고 복제된 경로를 추적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콘텐츠를 암호화하는 방법은, 콘텐츠가 사용자의 눈이나 귀에 전달되기 위해서는 어느 단계에선가는 암호가 풀린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결국 이 방법은 콘텐츠를 재생하는 기계나 프로그램이 암호가 풀린 디지탈 형태의 데이터가 새어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담합에 의해서 유지된다. 수많은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동작할 수 있는 환경, 특히 PC와 같이 사용자가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담합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만약 법적, 제도적 강제를 통해 이러한 담합이 잘 유지된다고 해도, TV나 스피커로 가는 출력을 녹화/녹음하거나 극단적인 예로서 캠코더로 영화 화면을 녹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아날로그 상태를 거치므로 어느 정도 품질의 저하는 피할 수 없지만 사용자들이 감상하기에 충분한 정도는 될 수 있고, 한번 복제한 후에는 품질의 저하 없이 무제한으로 복제할 수 있다.

워터마크와 압축 기술의 모순

한편 콘텐츠에 새겨 넣은 은밀한 표식을 워터마크(watermark)라 한다. 물자국처럼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알아보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이다. 워터마크는 여러 가지 용도로 응용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작품에 서명이나 낙관을 하듯이 저작권자를 표시해서 후에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판매할 때 제품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를 표시해서 복제본이 발견되었을 때 누가 복제한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가능하다.
이상적인 워터마크는 사용자에게 보이거나 들리지 않으면서 변경이나 제거가 불가능해야 한다. 콘텐츠를 복제하거나 압축하거나 일부분을 잘라내어도 워터마크 정보가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워터마크 정보는 콘텐츠 데이터의 전체에 걸쳐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를 주어서 기록된다. 디지탈 방식에서 모든 정보는 숫자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사람의 눈이 10 만큼의 밝기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하면, 한 자리 수의 밝기 변화는 감지하지 못하므로 밝기 정보의 마지막 자리는 워터마크 정보를 기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워터마크의 이러한 특성은 바람직한 압축 기술의 특성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바람직한 압축 기술은 반대로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는 밝기 정보의 마지막 자리를 버리는 방법으로 압축을 하고, 복구할 때는 밝기를 10배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워터마크 정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물론 실제로 사용되는 워터마킹 기술은 흔히 사용되는 압축 방법 등을 고려해서 내구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지겠지만, 워터마크와 압축 사이에 이러한 근본적인 모순 관계가 있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디지탈 콘텐츠 관리 기술은 저작권자(콘텐츠 판매자)의 권리를 보호할 목적으로 개발되어 사용자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결국은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창작자, 판매자, 그리고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데, 기술의 본질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강제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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