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5호 사이방가르드
체제 기술 비틀기
카본 방위 연맹 ( Carbon Defense League)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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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상품 시장엔 두 불순물이 도사린다. 교환 가치의 조작이나 독점을 통해 폭리를 취하거나, 아니면 그 룰을 아예 깨 체제 전복을 꾀하고자 할 때. 전자를 행하는 자를 파렴치한 자본가라 하면, 후자는 반체제 혁명가급에 해당한다. 둘의 차이는 전자가 현대인을 더욱 더 절대 진리의 상품 시장에 종속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신화로 가득찬 상품 가치의 허상을 폭로해 까발린다. 이 두 집단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하면, 둘 다 시장의 환상을 깨는데 크게 기여한다.

현대 상품은 점차 기술과의 결합력이 증가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것이 지닌 가치와 가격에 비현실성이 더한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증시, 새로운 모델로 사장되는 구제품, 복제품으로 인한 파산, 아이디어 하나로 떼돈을 버는 젊은 사업가 등등 시장 내 교란의 파장과 효과는 한번에 몰아치고, 갈수록 허상의 가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 와중에 시장의 전복을 실현하기 위해 ‘현행 질서 파괴’를 불사하는 자들도 등장한다. 한 예술가 집단이 눈에 띤다. 이들은 허망한 ‘원본’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자본주의 상품 시장의 거짓 구린내를 시민의 능동적 이용과 재활용을 독려하는 복제 ‘카본’의 정치 철학으로 헹궈내려 한다. 이름하여 ‘카본 방위 연맹’(Carbon Defense League)인데, 연맹답게 예술가, 정치운동가, 기술자, 이론가들로 구성되어 97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씨엔엔 등 각종 주류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하루 평균 5만명의 조회수를 기록했던, “리코드닷컴” (recode.com) 프로젝트는 바로 이 “카방연”과 비슷한 동기를 지닌 예술가 그룹 “콘그롬코”(conglomco)의 합작물이다. 시카고 현대 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 이 프로젝트는, 기성의 체제 기술을 활용,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통해 대중 앞에 자본주의 상품 물신의 거짓을 폭로하는 ‘전술 미디어’의 활용을 강조한다. 보통 창작물의 소유자나 대리권자들이 저작권 등 법적 장치를 통해 혼신을 다해 막으려는 것이 역설계다. 상품 교환의 독점적 가치를 성사시키려는 자에겐, 누군가 자신의 창작물의 코드에 변경을 가하거나 새로운 코드를 첨가하거나 기본 잠금 장치를 풀어헤치는 것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으려 한다. 카방연은 바로 상품 교환의 보편어이자 가격 체계의 근간인 바코드의 역설계를 통해 상품 유통 체제를 교란하는 큰 일을 저질렀다.

언뜻보면 월마트의 홈페이지를 흉내 낸 듯한 리코드닷컴은 바코드의 역설계를 위한 카방연의 기획 웹사이트이다. 카방연은 바코드가 현대 소비자의 상품 구매조건을 규정하는 화폐 다음의 권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 프로젝트가 바코드의 역설계다. 기존의 바코드 시스템에 이들의 소프트웨어를 삽입하면 헐값의 가격으로 상품가가 폭락한다. 이를 통해 상품 계산대 앞에서 바코드에 매겨진 거짓 교환가치에 우롱당했던 소비자들의 노예근성은 조각나고, 당연히 바코드의 질서정연한 시장 규칙은 해적 바코드로 엉망이 된다. 하지만 바코드의 역설계를 통한 가격의 ‘재코드화’(리코드)가 월마트와 같은 대형 초국적 유통업자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법원의 프로젝트 강제 중단 결정으로 카방연의 리코드 기획은 도중하차한다.

이미 98년과 99년에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과 함께 카방연은 역설계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 적이 있다. 거의 미국 청소년들의 문화의 중심이 돼버린 일본 닌텐도 게임보이의 롬 칩을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에프롬 칩’으로 대체하여, 새로운 대안적 유형의 게임보이를 보급했다. 당시 이들이 개발했던 해적용 게임 제목은 ‘슈퍼 키드 파이터’였다. 신나는 펑크 음악과 진행되는 이 청소년 게임의 서사 구조는, 한 청소년이 학교로부터 탈출해, 경찰에게서 물건을 훔치고, 교회가는 사람들에게 새총을 쏘고, 매춘 여성을 구해주고, 게임의 막바지에선 크랙(마약의 일종)을 꼬실리는 내용으로 흥미진진하게 꾸려진다. 2001년에는 아예 청소년들에게 이 게임의 개발킷을 씨디로 제작 보급해, 기존 닌텐도 게임보이를 소비자가 직접 프로그래밍하고 하드웨어를 통째로 변경하는 방법 등을 소개했다. 카방연과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의 이 개발킷은 수많은 국가들에서 번역되어 보급되기도 한다.

2002년 호주 멜버른의 시연 <프리플레이>는 또 다른 역설계 장치를 소개한다. 카방연은 미국이 중동 국지전에서 주로 공수해 프로파겐다용 선전 매체로 뿌리는 태엽식 단일 주파수 라디오를 개조해, 지역, 국제 뉴스를 청취할 수 있는 단파 라디오로 변신시켰다. 주목적은 제국을 조롱하고, 지역 해적 방송이나 커뮤니티 방송을 독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카방연의 독특한 ‘역설계’ 실험은 미래 대안적 문화 정치 모델 개발과 관련해 주는 함의가 적지 않다. 카방연은 역설계로 태어난 새로운 대상을 ‘기생 미디어’라 칭한다. 이는 체제 내 생산물의 비판적 재전유를 뜻한다. 대중은 역설계를 통해 단순한 소비 주체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상품이 지닌 원본의 이미지를 벗어나는 효과를 거둔다. 이는 자본 시장의 구매자들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본의 기술을 비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페다고지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이 점에서 단지 학술적 목적을 위한 역설계나 상업적 이익을 노린 해적 행위(이른바 용산상가 버전들)보단, 상품 물신을 깨고 이를 뒤집는 정치 교육의 수단으로써 역설계를 고대해 본다.

▲ 참고 웹사이트
카본방위연맹 홈페이지 www.carbondefense.org/
리코드닷컴 www.re-code.com/video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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