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5호 만화뒤집기
식용으로 길러진 인간
변기현 단편집 <로또블루스>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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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영국 시인의 시구(詩句)는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덜 유명한 그 다음 구절. 4월이 잔인한 것은 겨우내 세상을 감추던 눈이 녹아버렸기 때문이란다. 차라리 그 눈이 그냥 있었더라면, 그 무시무시한 ‘세상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 한반도 남쪽 절반에서, 굳이 4월이 잔인할 이유야 없지. 차라리 눈 녹는 2월은 어떨까?
물론 다른 고장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도, 점잖은 양반들은 세상의 본디 모습이 언제까지라도 가려져 있기를 바란다. 아슬아슬하게 주검을 가리고 있는, 얄팍한 홑이불 같은 일상. 그 일상이 세상의 진실이라고 믿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이 모두 그러하듯, 그 은폐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닌지라, 사노라면 언제 어디서라도 세상은 맨 얼굴을 우리 주변에 들이미는 것이다. 행여라도 그런 불운이 일어난다면, 2월이건 4월이건 중요하지 않다. 1년 열두 달이, 또한 가장 잔인한 달이어니.

일전 이 지면에, 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읽고 글을 쓴 적 있다. 그때 필자가 이야기하려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세상. 수록 단편 <사랑은 단백질>에서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이웃의 고기는 결국 ‘공룡 둘리’에 보이는 바, 프레스기에 잘려나간 이주 노동자의 손가락이다. 그런데 마침,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에서도 주인공은, 세상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조심스레 털어 놓는다.” 이 세상에선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고.

진실에 대한 또 다른 접근. 이번에 나온 변기현 단편집 <로또 블루스>를 보자.
특히 라는 제목의 SF 단편은, 인육을 먹는 사회를 설정해 놓았다. 이 사회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다. 먹기 위해 기르는 식용 인간 ‘food’와, 그들을 먹는 일반 인간. “근디 이것들도 참 불쌍하지.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것인디.” 그러나 불쌍해하거나 ‘데리고 노는’ 것 이상의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짓을 저지른 개인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벌을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벌인지는 필자의 입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직접 한번 읽어보시라.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은 현실을 빗대어 비난하지만,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지,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공간일 것만 같다. 세련된 그림은 유럽 만화 <제롬 무슈로의 모험>(부끄 作)을 연상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이 훨씬 더 디스토피아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단편 <로또블루스>에서, 작가는 자신이 리얼리즘에도 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 <요쿠르트 도시의 사랑> 등과는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SF의 공간이 아니라, 바로 21세기 한국의 도시가 배경이다. 내용이 더 사실적인 만큼, 그림도 덜 데포름하면서 그렸다.
매우 사실적인 그림과 연출이 특징. 다만 만화적 장치로서, 심리 변화를 외면화하는 점이 눈에 띤다. 원래 파리한 얼굴에 푸른 옷을 입고 있던 주인공 목사. 시간이 갈수록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려, 그의 마음이 사악함에 물들어 갈수록, 그의 몸은 탁한 핏빛으로 물이 든다. 피로 물든 모양을 하고, 자포자기한 목사는 뇌까린다. “예수의 피를 빨아서라도! 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결국 이 도시에서, 서로는 서로의 피를 빨고 살을 뜯으려 할 따름이다.

모처럼 흑백과 펜터치가 주조를 이룬 작품 <살인계획>에서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역시 살벌하기 그지없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평범한 가족. 그러나 사실, 평범함이란, 세상의 그 많은 처참함을 가리는 홑이불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계획>은 그 가벼운 눈속임을 굳이 들춰내고 있다.

이 여러 작품은 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를 연상시킨다. 손가락이 잘린 이웃을 오히려 내쫓고, 친구를 팔고, 결국 이웃을 잡아먹는 우울한 도시. 그러나 ‘공룡 둘리’는 그 밑바닥에 따뜻함을 깔고 있는 책이었다. <로또블루스>는 비록 작품 곳곳에 ‘사랑’이라는 소재를 다루 고 있지만, 좀 더 차갑고 뒤틀려 있다. 굳이 말하자면, 블랙 코미디랄까.
이러한 접근방식의 차이는, 그 각각의 그림 풍과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공룡 둘리’와 <로또 블루스>, 이 두 가지 작품 세계가 서로 어떻게 닮고 어떻게 다르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 지켜보는 일은 독자로서 행운이다. 이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아가는 많지는 않은 재미 가운데 하나가 될 것 같다.

한편, <로또 블루스>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세상의 ‘무시무시한 비밀’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매우 짧지만(6쪽) 재치 넘치는 단편 <루돌프>를 키득거리며 보고 난 다음엔, “우린- 다른 모든 사슴들이다!” 같은 대사를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을지 모른다. <요리특강> (2쪽)이나 <수호천사>(4쪽)처럼 더 짧은 작품들도, 어딘지 어두운 비밀의 느낌은 있지만, 특히 재치 있는 웃음을 주고 있다.

그러니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만화의 영역은 참으로 넓다. 만화로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상의 치부를 애써 감추려는 일도, 굳이 그 고통을 드러내어 고발하는 일도, 모두 가능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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