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5호 칼럼
실명제는 사이버폭력

전응휘  
조회수: 3417 / 추천: 56
다시 인터넷 실명제가 거론되고 있다. 정부가 소위 4대폭력 (학교폭력, 조직폭력, 사이버폭력, 정보지폭력) 근절대책 관계장관회의를 하면서 이 문제가 제기 되었다고 하는데 정부는 공식적으로 “잘못된 사이버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인터넷 부분 실명제 도입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고 한다. 소위 “사이버 폭력”이 무얼 말하는 것인지 필자는 과문해서 잘 알지 못하나 관계자들의 논평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이란 바로 “인터넷상에서의 명예훼손과 인권침해”를 뜻한다고 한다. 명예훼손 말고 또 다른 무슨 인권침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이미 규제법률이 있다. 일반 민법에도 명예훼손을 규율하는 법률이 있고, 사이버명예훼손을 규제하는 법률도 별도로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

사이버 상에서 일어나는 명예훼손 사례는 많은데도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찾기는 어렵단다. 그게 사실일까?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 도대체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명제를 이야기할 때인가? 지금 어떤 게시판이 실명제 아닌 곳이 있을까? 거의 대부분의 게시판이 실명제가 된지도 꽤 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익명게시판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런 실정이나 알고 얘기하는 것인가?

인터넷에서 글을 쓸 때 반드시 본인을 추적, 조회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아야만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실명제인데 이것이 얼마나 한심스럽고 후진적인 발상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우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실명제란 없다. 우리야 워낙 무감각해서 그렇지 세계 어디에도 회원제냐 아니냐 하는 선택은 있어도 실명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따지는 곳은 없다.

사람이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는 경우에 따라 그런 말이나 글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게 되거나 이상한 눈총을 받게 되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다. 여론조사에서 익명을 원칙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명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왜 비겁하게 익명의 가면 뒤에 숨느냐”는 식의 알다가도 모를 이상한 주장들을 해대는데 그렇다면 신문기자는 왜 비겁하게도 취재원을 절대 밝히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표현행위란 사실과 허위, 비판과 비방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오죽 그런 구분이 어려우면 민법에서도 명예훼손 여부를 법정에서 가릴까. 그런데 모든 글에 대해서 실명을 밝히라고 한다면 당연히 글쓰기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 겁나서 글 한번 제대로 쓸 수 있겠느냐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어디까지가 밀실이고 어디부터가 광장인가? 명예훼손이란 공연성(公然性)이 중요한 구분의 기준인데 인터넷은 공연성의 구분 자체가 애매하기 짝이 없다. 개인홈페이지나 블로그는 공공연한 영역인가 아닌가? 법원에서조차 가리기가 어려운 것을 법없이 사는 일반 이용자들이 알아서 판단해서 글을 쓰라면 도대체 어찌하라는 것인가? 사이버폭력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실명제야 말로 사이버폭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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