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6호 사이버
무엇이 우리의 국제연대를 힘겹게, 혹은 가능하게 하는가
‘세계여성학대회’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가능성에 대해서 …

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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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에 열렸던 세계여성학대회(Women’s World 2005)가 한참 준비되고 있던 즈음, 나 역시 그 행사에서 활동가들을 위한 작은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그 워크숍에 오는 거야? 어떤 사람들이 와?”
다른 하나는, “세계여성학대회면 영어로 진행될텐데... 영어가 돼?”
<네트워커>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국제연대를 시도하는 일은 다른 지점에서의 어려움들까지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세계여성학대회라는 큰 행사를 기회로 삼아, 해외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겠다는 나 나름의 야심찼던(?) 계획 역시 준비 단계에서부터 앞서 말한 저 두 가지 장벽에 부딪혔다.

세계여성학대회는 전 세계에서 여성학 및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가져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이지만, 여성학 자체가 실천적인 영역들과 결코 뗄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에 활동가들 역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고 그 성과들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내가 준비했던 워크숍은 ‘The Rise of Young Feminists’ Power in Asia’라는 세션의 한 부분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두루뭉술 혹은 실체없이 거론되곤 했던 ‘영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긍정적인 역할들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제에서나 활동 방식에서나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해외의 차세대 페미니스트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관심사와 성과, 그리고 겪고 있는 어려움들까지도 함께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문제는 내가 초대하고자 했던 이들이 오랜 시간동안 활동하여 많이 알려져 있는 곳들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여성 네트워크에 속해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데 있었다. 비교적 젊은, 즉 이제 막 새로운 이슈들을 들고 나선 단체나 활동가들을 원했던데다가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다양한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알기가 힘들었다. 인터넷을 뒤진다고 해도, 아직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은 해외 대부분의 국가에서 홈페이지를 갖고 있을 정도의 단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역사가 있고 규모를 갖춘 단체들이기 때문에, 몇몇 알려진 단체들 이외의 다른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란 너무나 어려웠다. 혹시나 경험 많은 선배 페미니스트들에게 아는 곳이 있으신지 자문을 구해도 ‘그런 그룹은 잘 모르겠는데...’라는 대답 뿐.

어쩌면 이렇게 접촉이 힘든 이유가 아직 스스로의 국제 연대 경험과 노하우가 없는 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최대한 기존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일본과 필리핀의 단체, 그리고 한국의 단체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발표자를 확정하고, 당일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끌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자, 그런데 이러한 결심 이후부터는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언어 소통’의 문제였다.

많은 이들이 국제 교류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영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위축감도 있겠지만, 국제 교류에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이들 위주로 많은 것이 결정되고 논의되는 구조와 분위기에 대한 반감도 분명 있다. 세계여성학대회에서마저, 그리고 뭔가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고 연대해 나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자리에서마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을 가진 이들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부터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아시아의 젊은 활동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라면, 이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여전히 각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워크숍은 진행되었다. 언어 장벽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느냐고?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머뭇거렸고, 몇몇 발표자들은 통역자를 경유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을 평가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짧더라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나, 활동과 관련된 이미지 자료들을 통해 표현하고 공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졌더라면 그렇게 높을 줄로만 알았던 장벽을 뛰어넘어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회 첫날, 비자 발급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참석이 힘들게 되었다는 한 해외 활동가의 메일을 받고서, 정보 접근이나 언어 소통의 문제 말고도 국경을 넘어 연대하기 힘들게 하는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마냥 준비하며 모든 것이 해결될 때를 기다리거나,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해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 연대하는 일은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라면 더 잘 할 수도 있겠지만, 준비가 될 때까지 미뤄둔다고 하여 그 기회가 다시 오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준비’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갖는 환상이 아닐까.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세계여성학대회를 국경을 뛰어넘어 친구를 만드는 자리로 비유했는데,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일이 단지 서로에 대해 많이 알거나 말을 잘 하는 것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았던가. 우리에게는 사실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었던 것이고, 그 가능성이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점검하느라 머뭇거리고 지레 많은 것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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