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7호 기획 [불법도청 테이프 공개를 위한 특별법 딜레마]
과거사 진실 규명과 인권 보호를 위한 해법은?

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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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모의에 대한 안기부의 불법도청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이른바 ‘X-파일’을 둘러싼 논란으로 한국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과거 권력기관의 불법도청이 사실로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거대 경제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의 유착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구조화된 부패 고리의 뇌관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청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후, ‘언론의 자유 및 알권리’ 대 ‘프라이버시권’의 구도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후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청 테이프 274개가 추가로 압수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공개 도청 테이프에 대한 공개 및 이를 통해 드러날 불법 행위에 대한 수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전반적인 국민 여론은 이를 지지하는 듯 하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도청 테이프의 공개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하였다. ‘삼성 불법뇌물 공여사건 등 정·경·검·언 유착의혹 및 불법도청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대위’와 열린우리당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중립적인 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에서 도청 테이프 내용을 검증하여 공익에 관한 내용에 한해 공개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역시 공개 주체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으나, 조속한 공개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 하고 있다.

도청 테이프의 공개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법안 발의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중앙일보 등 일부 신문들이 인권 침해를 주장하며 공개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데 이어, 지난 8월 23일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특별법이든 특검법이든 그 형식 여하를 불문하고 불법 도청된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 및 통신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또한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 합리적이며 인권 보장에도 충실한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의 형식을 빌려 소급 입법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하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반(反) 문명국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과거 권력기관에 의한 불법 행위와 정치·경제·언론 권력의 유착과 비리에 관련된 진실를 밝히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익이다. 또한 국민들은 이러한 공공적인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 반면 사생활의 비밀과 통신의 비밀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인권이다. 우리가 직면한 이 딜레마를 풀 수 있는 올바른 해결책은 무엇일까?



도청 테이프, 범죄 행위와 공익적 내용은 공개해야 vs 적법절차의 원칙 위배

도청 테이프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라는 요구는 크지 않다. 대체로 도청 테이프 내용 중에 사생활 부분은 제외하고 범죄 행위 및 공익적 내용에 대해서는 공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또한 수사는 검사 혹은 특별 검사가 수행하되, 테이프 내용의 공개는 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하자는 제안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8월 31일 국회에서 개최된 ‘안기부 X파일, 진상규명과 수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토론회에서 법리적 검토를 맡은 김갑배 변호사는 테이프 내용 공개를 위한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인격권과 사생활 비밀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으며, 그 제한의 목적과 방법 등에 있어서 ‘과잉금지 내지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즉, 권력 집단의 구조적 비리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한 분석 및 평가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입법 목적이 정당하며, 공개 대상을 직무관련 범죄 및 공익에 관한 사항으로 한정함으로써 사생활의 비밀 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므로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급 입법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김변호사는 “입법자가 공익에 관한 사항에 관해서 공개를 허용하는 별도 입법을 하는 것은 향후 금지된 행위 중 일부를 해제하는 것”이라며, 이것은 “입법자의 재량의 범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즉, 특별법이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에 반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를 공개하고, 수사 등에 이용하는 것은 헌법에 규정된 ‘적법 절차’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또한 공익적이고 불법적인 내용만 공개한다고 하지만, 도청 테이프를 열어 보기 전에 “그러한 내용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도청 테이프가 정치·경제 권력의 핵심 당사자들의 동향이나 대화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고, 그 안에는 불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추정이 법리적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 안에 불법적인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무관한 사적인 대화가 대부분이라면, 그럼에도 도청 테이프를 열어 보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 또한 만일 공공성을 근거로 (불법)도청된 대화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금은 특별법을 통해서 진행을 하지만, 향후에는 통신비밀보호법 자체를 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사 진실 규명의 문제로 접근해야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상당수의 진보적인 단체와 법률 전문가들은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혹은 ‘과거의 진실 규명’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통신비밀 보호 예외에 대한 일반 원칙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도청 테이프 공개를 위한 특별법에 찬성하는 것이 통신비밀보호법 자체의 개정까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도청 테이프 내용을 검토하고, 필요한 부분을 공개하는 것은 과거 안기부의 불법 도청 사실과 정·경·검·언의 유착의 역사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기부의 불법 도청 부분은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삼성과 같은 거대 재벌과 언론, 정치권력의 유착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과거의 부조리를 바로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절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개인의 자기정보통제권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인권 침해가 진공 상태의 사회가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고 했을 때, 과거 권력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보다 평등한 권력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궁극적인 자기정보통제권의 보호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그러나, 과정의 정당성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 진보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불법도청 테이프 공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자신의 비리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 언론이나 권력층에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권력 집단들이 저지른 부정부패를 생각할 때 과거의 권력형 비리들이 깨끗하게 공개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법적인 안정성을 흔드는 자의적인 법제정이 향후에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진보 진영을 공격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는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특별법이 ‘과거 청산이라는 공익성’에 명분을 둔 ‘정치적 결정’이라면, 이 사례가 근거가 되어 향후에 ‘전혀 다른 정치적 맥락’ 속에서 ‘공익성’을 근거로 한 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불법도청 테이프를 열람, 공개하는 것이 안기부의 불법 도청 진상과 정·경·검·언의 유착의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는데 어느 정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테이프 내용이 공개된다면 진상 조사에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사의 의지만 있다면 다른 방법이나 증거를 통해서도 충분히 조사할 수 있으며, 중요한 원칙을 희생하면서 테이프 공개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물론 불법 도청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진상 규명을 통해 더 이상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불법도청이 자리잡을 수 없도록 한다든가, 사회의 민주화가 한 단계 진척되어 보수로 회귀할 가능성이 없다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테이프를 열람하지 않는다고 즉각 폐기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마치 일정 기간 후에 비밀문서가 해제되듯이, 이후에 테이프 내용이 공개될 수도 있을 것이며, 추가적인 역사적 진실이 이에 따라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대외비 자료의 공개 원칙과 절차에 대한 규정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불법도청 테이프의 공개 문제에 대해 누구도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테이프 내용에 근거한 수사 가능한가...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수사의 범위에 대한 입장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현재 안기부 불법도청에 대한 수사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도청 테이프의 내용이 수사의 단서로 이용될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되고 있다.
테이프 공개를 비판하는 입장은 불법 자료에 근거한 수사 불가 입장으로 이어진다. 통신비밀보호법 및 독수독과 이론이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통신비밀보호법 제4조는 불법감청에 의하여 지득 또는 채록된 전기통신의 내용은 재판 또는 징계 절차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되어있다. 독수독과 이론은 ‘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도 독이 있다’는 의미로, 위법한 방법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사실 이는 수사과정에서의 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민사회단체에서 주장해왔으며, 오히려 검찰이 기존에는 독수독과 이론의 적용을 축소해왔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례에서는 독수독과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나의 사건(불법도청)을 수사하던 중에 다른 범죄의 발견(예를 들어, 불법정치자금)은 정당한 수사의 단서로 활용될 수 있으며, 여기에 독수독과이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은 제3자인 참여연대의 고발에 근거하여 수사하거나, 특별법에 의한 위원회가 범죄 혐의를 통지할 경우에도 검찰은 수사에 착수할 수 있는데, 이는 독수독과의 예외가 인정되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독일, 특별법을 제정해서 도청 자료 공개

이와 비슷한 사례가 독일에서 있었다. 독일은 통일 후 구동독의 비밀병찰인 국가안보부(슈타지)의 도감청 자료를 발견하였다. 이 자료는 파일 1700만개, 사진 100만장, 그리고 도청 테이프 9만개에 달했다. 독일은 이 파일들을 공개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슈타지 문서관리법’이라는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사생활 보호의 원칙에 따라 본인만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하되, 공익적 목적에 따라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수사에 대한 규정이 없고, 이 법에 의해 형사처벌 된 사람도 없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도청이었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우리나라 상황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자마자 X-파일 문제는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이 제출한 테이프 공개에 대한 특별법과 특검법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논의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이러저러하게 도청 테이프에 연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세력들의 반발로 정치정세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논란

안기부의 불법도청 사실이 드러난 후, 정치인과 언론의 통신비밀보호법(아래 통비법)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높아졌다. 물론 안기부의 도청 행위는 통비법의 문제와는 상관없는 ‘불법’ 행위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통비법 개정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정보기관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현 국가정보원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봐야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안기부의 불법도청 행위와 무관하게, 통비법의 일부 내용은 이전부터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통비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터에, 기존에 지적된 문제들을 수렴하여 법 개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한나라당 김석준 의원과 김희정 의원이 각각 발의한 개정안이 제출되어 있다. 김석준 의원안은 ‘통신사실 확인자료의 보관기간을 3개월로 하고, 이를 법률에 명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법무부는 지난 6월, 통신사실 확인자료의 보관기간을 6개월 내지 1년으로 규정한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였으며, 시민사회단체는 통신사실 확인자료의 보관을 의무화하는 것은 국민의 통신 내용을 수사 목적을 위해 남겨두는 것으로 인권 침해라 비판한 바 있다. 김석준 의원안은 비록 보관 기간을 단축하였으나 동일한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수사 목적을 위한 보관 의무화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김희정 의원안은 ‘감청설비 탐지 사업자가 탐지활동 결과를 정보통신부에 통보하고, 이를 정부가 국회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오히려 기존에 문제로 제기되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개정안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우선 현재 통비법에서 감청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범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내란·외환죄를 포함해서 100가지가 넘는 범죄를 대상으로 허용하고 있다. 또한 감청 후에 대상자에게 사후 통보를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위태롭게 할 현저한 우려가 있을 때는 통지를 유예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감청 기간과 연장 기간도 단축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감청의 절차도 개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법무법인 지평의 이은우 변호사는 “현재는 수사기관이 직접 감청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어 불법 감청이 될 여지가 많다”고 지적하고, “감청할 때 통신회사 직원이 참가하고, 감청 결과물에 참관인 도장을 찍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감청 절차를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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