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7호 칼럼
합법적 감청의 제도화와 시민사회의 의견수렴

전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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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불법도감청 행위를 했다는 사건의 최우선적인 문제는 그것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불법적인 도감청행위라는 사실에 있다. 국가공권력이 불법을 자행한다면 과연 법치주의의 존립근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실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그 다음의 질문은 그렇다면 합법적인 감청행위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질문은 상당히 신중하게 제기되어야 한다. 먼저 통신내용과 통신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대체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러하지만 우리나라의 법제도에서도 통신내용의 비밀은 보호하되 통신사실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만 열람을 허용하고 있다. 통신사실은 흔히 ‘통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통신비밀보호법에서도 컴퓨터의 로그기록이나 이동통신 기지국의 위치추적자료 등까지 이러한 데이터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최근에 해외에서는 이러한 통신사실관련 데이터까지도 통신내용 중 민감한 내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기 때문에 이러한 데이터 중 열람 가능한 범위를 더욱 축소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합법적인 감청과 정보통신 기술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입법이 이루어진 예는 미국의 수사 지원을 위한 통신보조법인 칼레아(CALEA)법이 있는데 이것은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여 합법적으로 감청행위를 할 때 법집행의 실효성을 위해서 통신서비스 제공자가 감청기술을 개발하도록 하고 있는 제도이다. 즉, 통신내용의 경우 비밀보호가 원칙이지만 국가안보라든지 공공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법으로 정해서 제한적으로 감청을 허용하되, 이를 법으로 허용한다 하더라도 감청 자체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는 법집행 자체가 무의미해 지므로 이를 법으로 의무화한 것이다. 칼레아법은 처음 입법 단계에서부터 논란도 많았고, 실제 제도형성과정에서 범위가 많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도 인터넷전화(VoIP)와 같은 통신서비스에 이 법을 적용해야 하느냐, 즉, 법적용대상에 대한 범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캐나다에서도 2002년에 이미 이러한 법제도를 만들 것을 선언하고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올 초에 다시 관계자들과 협의를 해서 최근 법안의 골격을 제시한 바 있다. 캐나다의 경우 현재 제시된 골격을 보면 시민사회단체나 소비자들의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우려를 반영하여 통신사실에 관련된 데이터에 대한 ‘합법적인 접근’(legal access)을 허용하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단서조건들을 두고 있으며, 통신서비스업체의 감청기술 보유에 대해서도 가입자 수가 일정규모 이하인 사업체나 비영리기관, 내부통신망서비스 등에 대해서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법집행시 있을 수 있는 남용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감독기구를 두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든가 독립적인 감독기구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도 늘 해왔지만 해외사례와의 차이는 비교적 분명하다. 우리의 경우는 의견수렴은 형식적이요, 소비자나 이용자의 관심 보다는 행정부처의 편의가 늘 정책적 선택의 우선순위가 된다는 점.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책적 선택에 대해서 소위 ‘국민의 대표자’라는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당정협의회라는 명목의 행정부처 정책발표회 시간을 통해 거의 언제나 흔쾌히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정협의회는 언제나 그렇듯 비공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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