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7호 만화뒤집기
그림자를 담고 있는 빛
김인, 『그림자소묘』

신성식  
조회수: 3048 / 추천: 46
‘새만화책’이라는 만화전문출판사가 있다. 작은 출판사이다. 이미 30여권의 만화책을 출판했다. 적은 규모가 아니다. 만화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소중한 출판사이다. 왜냐면 돈이 아무리 많은 출판사조차 찍어내기 힘든 좋은 만화책들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 내 책도 찍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고를 가져간다고 무조건 출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희망 때문이라도 이런 출판사는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잘나가야 한다. 이에 보탬이 된다면 약간의 음모(이런 기회를 적극 이용해서 띄우는)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왜냐면 언젠가는 나도... 아무튼!

이 음모의 시작은 『그림자 소묘』(김인 지음 / 새만화책 펴냄)이다.

목차를 보면 ‘내 마음의 지도’와 ‘그림자 소묘’ 두 편으로 되어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다. 작가에 따르면 ‘그림자 소묘’를 먼저 작업하였다고 한다. 그 의미가 두 편의 만화가 독립적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한 편만 봐도 괜찮고 이어 봐도 되고 ‘그림자 소묘’부터 봐도 되는 재미난 작품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주인공 주희는 ‘깡촌’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여기서 깡촌은 고등학교도 없어서 장래가 불투명한 곳이고 서울은 그런 면에서 좋은 학교도 있고 좋아하는 미술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는 곳-전형적인 대비-이다. 서울은 너무나 복잡해서 길을 찾기도 힘들다. 우여 곡절 끝에 메마른 도시 속에 생명들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지도를 완성한다. 그 생명들이란 옆집의 감나무, 학원 앞의 해바라기, 상추, 대추나무, 호박 등등이다. 주희에게 서울의 사물들은 대화가 안된다. 따라서 그 건물들과 주차금지용 의자들은 표지판의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주희에게 길안내를 해줄 수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동네 할머니가 대문 위에 기르는 상추는 그 걸 가능하게 해준다.
교감! 주희가 깡촌에서 늘 봐왔던 해바라기와 산과 강과 집과 나누었던 것처럼 말이다. 교감이건 교통이건 대화건 아무튼 일방이 아닌 쌍방이라는 전제는 관계의 시작이다. 주희라는 일방에서만 이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 생명들도 주희에게 도움을 준다. 그야말로 주고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희가 좋아하는 해바라기는 입시 중심의 메마른 학원이 아니라 따뜻하고 소박한 화실로 이끌어준다.
여기서 주희의 능력, 즉 누군가와 교통할 수 있는 심성(?)은 뒤에 존재감을 잃은 한 친구와도 교감을 하는 바탕이 된다. 여기까지가 ‘내 마음의 지도’의 이야기다.

‘그림자 소묘’에서는 그림자를 잃어버려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친구가 나온다. 작품 뒷부분에서 언급이 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미완이기도 하고 불완전한 것이기도 하다. ‘빛은 이미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잘 어우러져야 ‘이 공간이 만들어’져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건 왕따를 당하고 그래서 그림자를 잃고 존재감이 없어진 친구에게 순수한 주희의 ‘시선’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고 비로소 다른 사람들도 그 친구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림자가 있으므로 말이다. 주희는 피터팬에게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처럼 친구에게 그림자를 찾아 준 것이다. 여기서 피터팬의 한 대목이 조금 다른 그림체로 그려지게 되는데 이것은 단지 ‘그림자를 찾아준 웬디’라는 중요한 모티브로서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작품의 느낌을 동화처럼 보여주는 구실도 함께 한다. 작가의 의도가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전체 작품의 그림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면 ‘그림자 소묘’는 주로 연필과 콘테를 이용하여 그린 흑백 작품이다. 여기서 심각한 우스개 한 대목. 10년 전 만화전시회에서 엿들은 대화이다.

“이건 만화가 아니야”
“왜?”
“이렇게 연필로 그리면 인쇄가 안돼!”

연필로 그리면 인쇄가 불가능하다니! 먹만을 쓰고 스크린톤만을 쓰며 가로 19.5 × 세로 26.5라는 규격을 만든 건 다 4×6배판 만화 잡지를 값싸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즉, 제작 단가를 낮추기 위한 것이지 만화의 형식을 규정하는 정의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런 대화를 얼마 전에도 들었다는 사실이다.
먹을 사용하는 만화도 있고 연필로 그린 것도 있고 사진으로 한 것도 유화든 뭐든 다 있어야한다. 그런 면에서 ‘그림자 소묘’에서 보여준 연필 소묘는 신선했다.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다양성을 한국 만화판이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말이다. 연필 소묘의 따뜻한 느낌과 그에 걸맞는 결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푸근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작품 전체적으로 좀 짧은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그건 완결성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이런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고 느끼고 싶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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