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9호 나와
김하경이 들려주는 천일야화
작가김하경

남운   the1tree2jinbo.net
조회수: 3854 / 추천: 59
이진희(아래 ‘이’) : 선생님이 처음 문학 활동을 하셨던 그 때와 현재의 생각이 서로 달라지거나, 또는 새로운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하경(아래 ‘김’) : 우선 그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으니까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특히 문학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요.
처음 등단할 때만 해도 문학을 통해 사회를 바꿔보리라는 엄청난 꿈을 꿨지요. 반드시 역사에 남을 굉장한 작품을 꼭 남기겠다고, 아니 그런 작품을 쓰겠다고요. 꿈도 야무지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땐 그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아주 작은 거 하나 이루고 가기도 힘들다는 걸 알았거든요. 별 거 아니지만 아주 작은 한 가지라도 남기고 간다면 그것도 굉장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케테 콜비츠는 일찍이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는데, 나는 훨씬 뒤늦게서야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였거든요. 그걸 깨닫자 쓸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라도 그걸 알았으니 다행이죠. 어쨌든 천재도 아닌 주제에 무슨 대단한 작품 남기겠다고 용을 썼으니 참 웃기죠. 이젠 그런 소리 안 합니다. 그냥 내 맘에 드는 아주 작은 작품 하나만이라도 남길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게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죠.



이 :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신데 주로 하고 계신 것은 무엇인가요?
김 : 주로 내 작품을 쓰고,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는 문학 동아리 회원들의 글쓰기를 지도하거나 독려하고, 각종 문학 강의에도 나가며 생활합니다.

이 : 노동문학 활동을 오래 해오셨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인간다움 혹은 인간애란 무엇인가요?
김 : 어려운 질문이네요. ‘노동문학’은 다른 문학과 달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굳이 ‘노동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노동문학이 다른 문학과 다른 그 지점, 바로 그 차이가 노동문학의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노동문학’이란 말 잘 안 씁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작품이 거의 없거든요. 그러니까 ‘노동문학’이란 용어 자체가 맞지 않는 셈이지요.
나는 처음부터 내 소설에 노동문학이란 용어를 붙이는 게 참 거북했습니다. 너무 강하고 튀어 보이는 것 같아 영 어색했거든요.
어쨌든 노동문학이든 그냥 문학이든 모든 문학은 인간다움, 인간애를 추구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작가마다 인간다움, 인간애를 다 다르게 생각할 것입니다.
단독자로서의 한 사람 한 사람은 한없이 약하고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사람이 여럿 모이게 되면 강해지고 부족한 것들을 서로 보완해 완전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것을 나는 인간다움, 인간애라고 생각합니다.

이 :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 : 나는 말과 글을 갖고 노는 걸 가장 재미있어 합니다. 현실을 꼭 짚어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한마디, 한 문장, 한 단어를 들으면 온몸에 전율을 느낍니다. 꼭 필요할 때 때맞춰 튀어나온 한 마디가 분위기를 절묘하게 업 시키면 스프링처럼 바닥에서 튀어오르게 되죠. 그만큼 기쁘죠.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한마디를 찾았을 때는 어떻구요. 그 환희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무엇보다 대화에서 유난히 많이 웃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탁구공이 왔다갔다 하듯이 말이 척척 잘 통하게 되면 저절로 좋은 감정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죠. 그럼 다음에 또 만나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요즘 프랑스에서 가장 최고의 인기작가인 아멜리 노통의 소설은 하나같이 말을 갖고 노는 소설들입니다. 한마디로 말놀이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라고나 할까요? 불어로 읽었다면 훨씬 더 말의 재미를 느꼈을 텐데 불어를 몰라서 무척 아쉽더군요. 나는 아멜리 노통의 소설보다는 수많은 프랑스 독자들이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 더 부러웠습니다. 프랑스 독자들이 아멜리 노통의 언어유희를 같이 즐기지 못했다면 결코 그의 소설이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언어를 즐길 줄 아는 프랑스 독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소설은 언어의 예술입니다. 언어를 통해 울고 웃게 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도 정작 언어에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전공자나 관심을 갖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죽어라 내용만 파거나, 아니면 죽어라 이미지만을 뒤쫓습니다. 언어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즐길 턱이 있겠습니까. 내가 소설을 읽는 건 다른 재미도 재미지만 무엇보다 그 언어가 주는 재미 때문입니다. 그런 재미가 없다면 그 두꺼운 책들을 어떻게 끝까지 다 읽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가장 큰 재미는 내 소설을 쓰면서 언어의 마술에 빠지는 것이고, 두번째 재미는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의 마술에 공감하는 것이고, 세 번째 재미는 내가 느낀 재미를 다른 사람에게 재현해서 들려줄 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재미에 공감하여 함께 좋아한다면 재미가 배가되는 건 물론이고요.


이 : 천일야화를 진보네트워크에 연재하고 계신데, 인터넷 소통에 대해 좋은 점과 개선돼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은 낡지만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 유익한 지식, 영양가 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넘치면 뭐합니까. 안 보고 안 읽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지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다양한 세상을 알 수가 없지요. 끼리끼리만 소통하면 다른 세상과 소통할 수가 없지요. 새로움,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도나도 인터넷에 글을 써서 올립니다.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따로 없을 만큼 글을 많이 씁니다. 문제는 자신은 그렇게 글을 많이 쓰면서도 남이 쓴 글은 잘 안 읽는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고, 남의 말은 듣지 않는 것이지요. 상호적이 아니라 일방적이기만 한 글쓰기는 소통의 글쓰기가 아니라 불통의 글쓰기일 뿐입니다.
인터넷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낡은 속담처럼 제대로 꿰어서 사용해야만 보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안 그러면 쓰레기일 뿐이지요.

이 : 천일야화는 문학 창작에 있어 비술의 단초라고까지 보셨는데요. 문학(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인 한계가 어느정도라고 생각하시나요?
김 : 작가 개인으로서 말한다면 표현의 자유에는 사회적 한계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제가 사회 지도자적 위치에 있게 되거나 행정기관의 수장이 된다면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바라보는 위치와 입장에 따라 사물은 얼마든지 달라 보일 수 있으니까요.

이 : 향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김 : 천기를 누설할까봐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눈을 감는 그날까지 글을 쓸 것입니다.

이 :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하경 작가가 쓴 책

교육평론 <여교사일기> 1978 [주간시민사] ( [주간시민]에 1976-1977 연재)
장편 <그해 여름>1991, [도서출판 세계]
꽁트집 <호루라기>1992, [과학과 사상]([전국노동자신문]에 1991-1992 연재한 꽁트 모음집)
장편 <눈뜨는 사람> 상하권 1994, [일터와 사람]
노동운동사 <내사랑 마창노련>상하권 1999, [갈무리]

중단편 :
단편 <별 아래 횃불 들고>1989 월간 [노동해방문학],
중편 <젊은 날의 선택>1992, 계간 [민중문예]
단편 <속된 인생>1995, 계간 [삶, 사회, 그리고 문학]
중편 <청비리>1995, 월간 [작가]
단편 <바위가 파도에게>1997, 월간 [길]

그밖에 시사글, 꽁트(연재), 노동자면담기(연재)가 있음.
그리고 1994년 10월 31일 마창노동소설모음집 <그래! 다시 하는 거야>를 엮음.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