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9호 과학에세이
단풍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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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이다. 지금쯤이면 계룡산을 비롯한 중부권의 산들이 단풍절정기에 막 들어서고 있겠다. 주말이면 단풍에 취한 사람들로 산과 길마다 몸살을 앓는다. 빨강, 노랑, 갈색이 서로 뒤섞여 타오르는 가을산의 풍경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곧 낙엽이 지면 다시금 인생의 허무함을 논하게 될지라도 지금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저 선연한 색채 앞에서 무엇을 앞당겨 걱정하랴.

단풍의 정체는 무엇인가. 색깔의 근원으로 따진다면, 붉은색 계통은 안토시아닌(Anthocyanin), 밝은 오렌지색은 카로틴(Carotene), 노란색에서 오렌지색 계열은 크산토필(Xanthophyll), 그리고 갈색계통은 탄닌(Tannin)에 의해서 발현된다. 겉으로 보면 가을이 되어야 나타나는 듯하지만, 이러한 물질들은 사실 봄부터 생겨나서 어린잎과 줄기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엽록소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지키는 역할을 한다. 모름지기 잎의 주인이자 나무의 생명은 한결같이 엽록소이다.

가을이 되어 밤이 길어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는 월동준비에 들어간다. 물이 무엇보다 부족하므로, 물 쓰임새를 줄이기 위해서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층을 만들어 물과 당의 이동을 막는다. 그래도 잎은 가을의 남은 햇빛으로 광합성을 계속한다. 이 때 만들어진 당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잎의 산도를 높여 엽록소를 파괴한다. 그 동안 엽록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카로틴, 크산토필이 비로소 나타나고, 남아있는 당을 이용해서 안토시아닌이 생합성된다. 탄닌까지 포함해서 단풍의 색깔에 관련된 물질은 모두 뿌리가 같다. 당에서 출발해서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나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색을 보여준다면 단풍의 아름다움은 훨씬 못할 것이다. 단풍의 색깔은 같은 나무라도 잎마다 조금씩 색깔이 다르다. 온도, 햇빛, 물의 양에 따라서 단풍의 색채는 달라진다. 예컨대 붉은 색은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고 햇빛이 좋을 때 가장 좋다. 현란하고 다채롭고 아름다운 단풍의 색깔은 붉은색과 노란색과 갈색의 무수한 조합들이 만들어내는 변주곡이다.

하지만 단풍은 수명을 다한 나뭇잎이 안간힘을 써서 태우는 마지막 촛불같은 것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청장년의 시기를 지나 황혼으로 접어드는 때이다. 결코 드러나는 일 없어도 한평생 자기 몫의 노동을 다하고, 남아있는 생이 얼마가 되든지 끝까지 아낌없이 제 몸을 던진다. 그래서 단풍은 몇 가지 감춰진 색소의 조합에 머물지 않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를 아로새기듯이 지금 이 산과 저 산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 것이다.

여느 해보다 더 곱고 뜨거운 단풍 앞에서, 우리네 노동운동판이 제 스스로 자연의 일부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투쟁을 하든지 교섭을 하든지 선거를 하든지, 제발 상식과 순리를 좇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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