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9호 파워인터뷰
김인규는 죄가 없다!
정말이지...착하게 살고 싶었답니다

임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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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애(아래 ‘임’) : 터미널 벽화작업은 어떤 느낌인가요?
김인규(아래 ‘김’) :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에요. 몸은 굉장히 피곤한데... 아이들과 사건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이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줘요. 오르가즘을 느끼죠. 물론 ‘이렇게 그려, 이렇게 그리는 게 좋겠어’라고 말은 하지만, 아이들이 내 명령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아이들도 자기대로 생각이 있고. 예를 들어, ‘머리색은 파란색으로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면 아이는 ‘저는 파란색 싫어요. 파란색 안 쓸래요’ 라고 해요. 표정도 나는 사실적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캐릭터로 가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고. 공간을 안배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메니져죠.

임 : 작업하면서 생긴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세요.
김 : 정말 재밌는 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주민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와요. 개입을 한다구요. 그러면서 소통이 되는 거고. 동시에 동네에서 아이들이 판을 벌이고 주민들은 애들이 벌여놓은 판에 구경도 하고 참견도 하고. 노인네들 버스 기다리면서 그림 그리는 애들한테 말도 시키고. 사람 그리고 있으면 비 안맞는 곳에 그리라하고. 그러면 처마 밑에 그려줘야지. 하하하... 벽화는 일방적으로 우리가 그리는 게 아니라, 사전 설문조사를 하고 그걸 토대로 스케치 한 거예요. 주민들의 의사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려했어요. 거기 그려진 사람도 여기 살고 있는 주민의 모습이에요.

임 : 얼마 전 공대위 출범식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김 : 참석을 못했죠. 수업중이기 때문에, 못가겠다 그랬어요. 수업 중에 거기 가 있는 것도 이상하고.

임 : 지난 7월 대법의 판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 : 그 사람들도 억지로 짜 맞추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아마 교사가 벗은 몸을 홈페이지에 올린다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을 거에요. 어쨌든 교사가 벗고 올렸다는 상징적 의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감춰야 될게 너무 많은가 보죠.

임 : 홈페이지 구조가 굉장히 독특한데요, 의도적 설계인가요?
김 :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불친절한 거죠. 제가 볼 때 인터넷이라는 것은 굉장히 친절한 구조인거 같아요. 3초라든가? 사람의 관심을 결정하는 순간이. 그 순간을 잡지 못하면 버려지는 거죠. 그래서 인터넷이라는 하이퍼텍스트는 머물러 있기 보단 끊임없이 흘러가는 거죠. 나는 인터넷이 미끄러지는 구조가 아닌가 해요. 물론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클릭을 하잖아요.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런 구조, 아주 편리한 구조죠. 그런데 우리 삶이 가지는 물리적 구조는 항상 불편하거든요. 컴퓨터도 그렇잖아요. 끊임없이 고장나고, 말썽을 일으키는. 정상적인 상황을 유지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거죠. 나이 들면서는 그것을 굉장히 강하게 느껴요. 그런데 그 불편함이나 좌절감 같은 게 나는 우리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봐요. 그 좌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거해야 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의 일부로서 끌어안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제 사이트는 좌절감을 느끼게 하죠. 하하하. 사실은 제가 인터넷을 잘 다룰 줄 몰라요. 근데 사실 그보다 더 잘 만들 수도 있죠. 그러니까 제 사이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거죠.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 내가 이해하는 방식에 동참하는 사람. 간혹 보면 동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시간이 많으신 분들이지. 인내심이 탁월하신 분들이죠. 하하하...
임 : 그러다 저는 사이트에서 길을 잃었답니다.
김 :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 낸 이미지들도 그냥 쉽게,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면 사실 때로 우리가 하지 못하는 말들,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말들, 직접 까놓고 바라보기 어려운 삶의 단편들... 나는 그런 것을 드러내는 거거든요, 내 작업을 통해서요. 왜냐면 그걸 외면하는 것 그리고 그걸 우리 삶에서 제거하는 것, 그게 오히려 우리 삶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을 해요. 좌절이라든가, 분열이라든가, 어떤 분절성. 그런 것들이 우리 삶과 연관된 것들이라고 보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이미지로 퍼올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에 있어서도 아주 편안하게 보여질 수 없는 거죠. 때문에 내 사이트 구조자체가 그렇지 않은 구조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나는 그걸 원했거든요. 길을 잃어버리면 그냥 닫아버리잖아요. 뭔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막 한꺼번에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거죠. 내 사이트 구조자체가 내가 삶을 드러내는 방식과 같다고 봐요. 의도적으로 그런 식으로 짠 거예요. 그래서 많이들 안오죠.

임 : 사건 이후, 홈페이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김 : 당시 문제가 된 작품들은 내리지 않고 변형만 시켰어요. ‘우리부부’ 사진 같은 경우도 그냥 그대로 두고 성기가 문제 있다니까 성기 지우고, 얼굴이 문제가 된다고 하니까 얼굴 지우고. 판결문 일부를 거기다 써놨어요. 그런 식으로 변형시켰죠. 말하자면 그 자체가 일종의 역사죠. 사회와 부딪히면서 내 작업이 진화해간 방식인가? 하하하... 있는 그대로 올려놓기 보단 오히려 그걸 떠나서 대법이나 검찰에 의해서 벌어진 그 흔적을 그대로 끌어안고 이미지를 올리는 것이 훨씬 더 유의미하다고 느껴지더라구요. 그렇다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거 같아요. ‘앞으로도 결코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너무나 강하게 내 삶에 각인이 된 거 같아요. 그 사건들... 너무나 커서... 내 인생에 너무나 큰, 너무나 큰 거죠. 앞으로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람들이야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나야 잊을 수 있겠어요? 끊임없이 의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고. 작품을 해도 그렇고.

임 : 한 명의 예술가에게 참으로 가혹한 사회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 : 그 사람들은 내 작업이 너무 가혹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일종의 환각이죠. 영화 <노틀담의 꼽추>보면, 사람들이 여자나 꼽추를 처벌하는 과정을 보면 그래요.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을 뭔가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그걸 처벌하고 단죄하는 과정자체가, 어쩌면 처벌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인거 같아요. 내가 한 일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얼마만큼의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있어요? 증거가 있냐구요? 누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지, 증거가 없단 말이에요. 피해자는 없고 가상의 피해적 상황만이 있는 거죠. 그들이 상상하는 가상의 피해적 상황을 놓고 벌인 일종의 그들만의 축제죠. 하하하... 재밌잖아요... 일종의 그거죠, 수다 떠는 재미. 하하하... 누가 하룻밤사이에 바람이 나서 이웃집 총각하고 도망을 갔다더라. 이웃집 총각하고 바람이 났는지 어쨌는지... 하여간 도망간 처자를 단죄하는 그 과정자체가 얼마나 즐거운 축제에요. 하하하... 안 그런가요?

임 :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요?
김 : 몸하고 성하고... 그런 걸 이야기 하고 싶었죠.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어찌보면 ‘우리부부’ 사진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은 아니에요. 보통 우리는 하나의 독립된 작품만을 예술작품으로 생각하잖아요? 근데 이 작품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죠. 어떤 사람은 ‘그 사진에 무슨 예술성이 있냐?’ 반문하죠. 그 사진은 사실 내가 하고자 했던 어떤 시각적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에요. 그게 예술적이라는 거죠. 저는 예술을 시각언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건 ‘말’하고는 다르죠. 우리는 보여지는 것을 통해 존재를 인식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그 존재는 그러한 것이죠. 그러나 보여 진다는 것 자체가 본래 자연은 아니에요. 그건 인위적인 것이고, 의도되어진 것이고, 계획되어진 것이죠. 근데 우리는 의도되어지고 계획되어진 ‘보여짐 자체’를 세상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잖아요. 나는 그 보여지는 방식에서 다르게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고... 우리 몸이라고 하는 것, 성이라고 하는 것도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게 접근해 보고자 했던 것이죠. 그동안 우리가 보던 것들의 허구나 모순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거죠. 내가 생각했던 예술적 행위는... 그 사진 한 장이 작품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건 하나의 소스가 되는거죠. 내 작업의 맥락을 보면 그냥 그래요. 그런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에는 그들이 굉장히 너무나 부족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제대로 봤을 수도 있어요.

임 : 그들의 유죄판결이 오히려 작품은 제대로 봤기 때문이라구요?
김 : 나는 오히려 그들의 유죄판결은 어쩌면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제대로 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들은 제 홈페이지에 와 ‘니 작품이 무슨 예술이냐! 음란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게 혐오스럽기만 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꺼져버려라!’ ‘세상에 너 같은 놈이 어딨냐! 게다가 선생이! 꺼져버려라!’ 라고 글을 올려요. 나는 나에 대한 유죄판결의 기본 정서는 이것이라고 봐요. 근데 그게 법률적으로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거든요. 그죠? 근데 그들의 분노를, 말하자면 유죄를 통해 해소한 거에요. 가령 과부에게 돌멩이를 던져 자기의 분노나 충격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죠. 근데 그들의 반응이 나는 어쩌면 내가 의도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왜냐면 한편으로 생각하면 ‘누드’라는 것은 즐기고자 하는 것이에요. 포르노도 그렇고. 성적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손쉽게 즐기고자 하는 것이에요. 특히 남성들이. 그걸 보고 아주 적당히 즐길 수 있어야 하거든요. 성적욕망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하고, 성적배설도 할 수 있어야하고. 근데 내가 만든 이미지로는 절대로 성적 욕망을 충족할 수가 없어요. 성적배설을 할 수 없다고요. 은밀히 즐길 수가 없다니까요. 너무나 적나라해서... 동시에 어떤 성적자극을 유발하기 보다는 황당하거나 마치 내가 스스로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있는 거 같다는 거죠. ‘우리부부’ 이미지 같은 경우에 그걸 즐길 수가 없잖아요? 차라리 포르노라면 즐길 수 있는데. 근데 내가 벗고 서 있는 상황이에요. 우리 마누라가 벗고 서 있는 상황이에요. 어디 방석집에서 아가씨가 벗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굉장히 황당한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난 그것에 대한 분노, 황당함, 혐오감이라고 봐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대상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른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체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그것이 그들이 느낀 분노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결국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을 그들이 제대로 느낀 것이고.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그걸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삶이 천박한 것이죠. 그런 이미지를 받아들 일수 없을 만큼 죄의식이 강했던 거예요. 그건 아마 자신의 음란함에 대한 죄의식이겠죠.

임 : 인간의 죄의식이라...
김 : 그러니까 자기 죄의식이 너무 강한거죠. 성을 떠올리는 순간, 죄의식이 너무 강해서 그걸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거죠. 우리 마누라하고 나하고 발가벗고 있는 것을 대낮같이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말할 수도 없고. 결국 어쩌면 제가 그걸 자극했다고 봐요.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내가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부부가 나란히 옷을 벗고 기념사진 찍듯 사진을 찍었거든요. 자연스러운거죠. 죄의식에서 벗어나면. 그런데 나는 ‘왜 그런가? 당신들 왜 여기서 죄의식을 느끼는가? 왜 추함을 느끼는가? 왜 누추해지는가? 여기서 왜 우리가 천박해지는가?’ 라고 계속 되물은 거고. 그 되묻는 방법으로 사진을 찍은 거예요. 사람들은 그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단 혐오감으로 ‘묻지마’, ‘그건 묻지마! 그건 얘기하지말자!’는 것이죠. ‘그 얘기를 왜 끄집어내는 거야!’. 그건 우리가 얘기해서는 안되는거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거고. 성은 적당히 어디 가서 예쁜 언니들하고 배설하면 그만인 거죠, 그들에겐. 그런데 나는 얘기를 해야겠다는 거고. 그래서 저는 내가 음란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거고. 한편에선 그래요. ‘까짓거, 예술이 음란하면 어떠냐!!’ 저도 그 말도 괜찮다고 봐요. 그런데 그건 내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새디즘이라던가, 그런 것과는 다른 지점에서 접근을 했던 것이고. 오히려 나는 성을 굉장히 명백하고 밝은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두운 영역이 아닌 오히려 밝은 영역으로 끄집어 들어가기 위한 제 나름의 몸부림이었거든요. 그걸 ‘어떻게 시각화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것이죠. 그런데 아직은 어려운가 봐요. 나도 그들처럼 은밀하고 어두운 것으로 가야하는 건가요? 하하하...

임 : 인터뷰 전에 <친절한 금자씨>패러디 보고 왔는데, 재밌던데요.
김 : 그거 쓰세요. 명확하게 출처와 맥락도 자세히 좀 밝혀주시고요. 사건을 당하면서 느꼈던 것이 제가 만든 이미지들이 맥락과는 상관없이 뚝 떨어져 따로 보도돼 버리면 굉장히 생경해지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그것이 유발시킨 쓸데없는 논쟁들, 사고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그냥 ‘쓰세요, 쓰세요’ 그랬는데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오독의 요소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맥락 안에서 작품이 이해될 수 있으면 좋겠지요. 꼭 글이 있어서가 아니라 접근하는 방식이나 보여지는 방식이나 바탕의 색깔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거든요.

임 : 그러고보니 페이지에서 사용하는 색이 굉장히 특이한 거 같네요.
김 : 그러니까 저는 굉장히 편치 않은 색을 쓰죠. 검정, 녹색, 회색 그리고 흰색. 인터넷에서 주로 피하는 색들이죠. 그 색상들이 정서적으로 제 접근방식하고 잘 맞아떨어져요. 인터넷에서 주로 사용하는 색상들은 말하자면 끊임없이 매끄럽고 편안하고 효과적인 색을 쓰잖아요? 저는 어떤 좌절감, 그리고 갑작스러움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이런 색을 통해 이미지로 온다는 것이죠. 색이 너무 강렬하면 다른 것들이 안보이죠. 제가 주로 쓰는 색은 배경이 아닌 그 자체로 살아나는 색이죠.

임 : 개인 작업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요?
김 : 욕망은 늘 있어요. 근데 쉽지가 않아요. 아이들과의 작업에 열을 올리는 것도 어쩌면 개인작업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 있어요. 생각하면 개인작업보다 아이들과 하는 작업이 더 좋기도 해요. 개인작업은 때로 굉장히 맥 빠지는 일이에요. 그건 자위일 수 있거든요. 마스터베이션의 공허함처럼. 사랑은 같이 해야 하는데 말이죠. 개인작업은 그런 것이 되기 쉬어요. 공동으로 형성시키는 의미나 가치가 좋은 거죠. 실패할 위험성이 낮다는 것이죠. 그 순간, 놀라운 희열이 있어요. 저는 그 순간 무조건 성공인거에요. 결과와는 무관하게. 혼자 작업하면서 이런 느낌을 갖기는 쉽지 않아요. 끊임없이 의심을 해야 하고, 의욕해야 하죠.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고,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좌절하고. 하하하... 공동작업은 그 순간 확인이 되니까. 그만큼 안전한 작업은 없다고 생각해요.

임 : 항소는?
김 : 여기서 끝나는 거죠. 변호사들이 더 이상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하네요. 500만원짜리 영화 한편, 4년 동안 찍은 거죠. 제작비 500만원 들고...

임 :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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