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9호 기획
정보사회를 위한 국제사회의 합의가 가능한가
2차 정보사회 세계정상회의(WSIS)에 대한 간이 보고서

전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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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중순에 튀니스에서 열리는 제2차 '정보사회 세계정상회의(WSIS)’는 오늘날 세계 커뮤니케이션 질서의 가장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터넷 혹은 아이피(IP) 네트워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에 대해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위 인터넷 가버넌스(Internet Governance)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인터넷 상에 널려 있는 여러 정보자원들에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인터넷 주소체계에 대해서 ‘과연 국제사회가 최종적인 감독권한을 보유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아직 정보사회정상회의까지 좀 더 막후협상이 진행 중이어서 최종적인 결과를 점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어떤 합의에 이르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미 2년 전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번 제2차 정상회의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직속으로 ‘인터넷가버넌스 워킹그룹(WGIG)’까지 구성하여 합의안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지난 9월말 끝난 마지막 준비회의의 결과는 여전히 두쪽난 세계 사이를 이어줄 다리를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물론 중요한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워킹그룹은 현재의 인터넷 주소체계를 관리하는 구조에 "어떤 조정(adjustment)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고, 그 조정의 방향이 ‘다자간 구도(multilateralism)’여야 한다는 점까지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세계 인터넷 주소체계 관리의 최종적인 감독기능과는 별개로 세계적인 의견수렴과 합의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느슨한 형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여러 관련 이해당사자들과 각국 정부가 함께 논의하는 포럼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워킹그룹의 보고서가 발표되기 전날 미국정부는 워킹그룹의 보고서에 대하여 마치 응답하듯이 인터넷 가버넌스에 대한 미연방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것은 곧 인터넷의 안전성과 안정성을 위해서 미연방정부가 역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세계 인터넷 도메인주소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변경하는 고유의 권한을 지속할 것이라는 입장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워킹그룹이 제시한 포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였고, 각국의 국가코드 도메인에 대해서는 각국정부의 주권영역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인터넷 가버넌스 구조에 어떤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재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가 기술적인 관리자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미국의 고집스런 태도표명은 3차 준비회의를 마지막까지 곤혹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마지막 3차 준비회의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미국의 입장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유럽국가들(EU)의 입장변화였다. 유럽연합은 워킹그룹의 보고서를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 같은 입장을 명확히 천명했다. 즉, 인터넷 관리구조에는 ‘새로운 협력 모델(new cooperation model)’이 필요하다고 언명했으며, 그러한 구조는 공공정책에 관여하는 각국 정부의 관심이 반영되어야 하며, 기본적으로 다자간 구도(multilateral basis)여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입장이 중국이나 중동국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입장과는 다르게 기본적으로는 민간 비즈니스 섹터가 인터넷 주소체계에 관해서 주도적으로 관여해야 하며, 다만 정부는 관리구조의 최상위의 틀과 연관된 문제들에 한해서만 정책의 원칙적 문제에 대해서 관여해야 하고 결코 이것이 정부가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럽연합 역시 느슨한 형태의 포럼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의했다.

미국의 방어논리는 의외로 단순했다. 기존의 인터넷 관리구조야말로 현재의 인터넷이 보여주는 최고의 서비스 환경을 만들어낸 가장 효율적인 구조였으며 이러한 구조의 안전성과 안정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논리였다. 또한 인터넷 관리구조의 국제화 필요성에 대해서 미국은 최근까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지역단위 인터넷 아이피(IP) 주소 할당기구가 구성된 것을 지적하면서 국제화는 지금도 점진적으로 진전되어 가고 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미국은 다자간 관리구조 형성의 필요성 주장에 대해 인터넷과 관련된 각국의 공공정책이 보다 더 민영화와 경쟁, 시장개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맞받아쳤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인터넷가버넌스 워킹그룹에서 이루어내었던 ‘다자간 구도로의 조정의 필요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보다 구체화된 제안을 제출했다. 유럽연합이 새로운 다자간 협력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과는 달리 시민사회단체들은 기존의 인터넷주소관리기구의 구조를 그대로 활용할 것을 권고했다. 단, 현재 이 기구가 가지고 있는 이사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를 포함하여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동등한 참여 형태로 의사결정구조를 바꿀 것을 제안했다. 또한 이 인터넷주소관리기구가 터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법 대신에 그 정신과 원리는 그대로 살리면서도 이 기구를 두게 될 ‘호스트 국가 협정(host country agreement)’에 관한 협상을 해나갈 것을 제안했다. 인터넷주소관리기구의 모든 의사결정과정이나 내용에 대해서 독립적인 이해당사자들의 리뷰위원회도 둘 것을 제안했으며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모두 구체화되는 시점에서 미국은 인터넷할당번호관리기관인 아이애나(IANA) 기능(루트서버를 편집하는 권한 - 인터넷상의 도메인네임을 만들거나 삭제하는 권한)을 이 주소관리기구에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유엔관련 회의가 어떤 결과물을 산출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은 후속조치를 위한 어떠한 실행계획을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부분에 관한 한 정보사회 정상회의는 아직 아무런 분명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다른 유사 사례를 돌아 볼 때 현재로서는 후속기구를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에 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칠레는 유엔경제사회이사회에 이미 설치되어 있지만 지난 수년간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에 있었던 "개발을 위한 과학 및 기술 위원회"(Commission on Science and Technology for Development, CSTD)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했고 정부들 안에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아직 불확실한 부분은 이런 틀을 살린다고 할 때 그것이 대다수 국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인터넷가버넌스 포럼(Internet Governance Forum)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이제까지 있었던 ‘유엔 정보통신특별전문위원회(UN ICT Task Force)’의 후속기구가 될 ‘Global Alliance’와는 어떤 관계를 맺게 될 것인지 하는 부분이다.

유럽연합이 제시한 새로운 협력모델은 아마도 이번 정상회의에서 어떤 극적 타결에는 이르지 못할 듯 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유럽연합이 이번 정상회의에서 구체적 결과를 얻어내기 보다는 다시 코피 아난 사무총장에게 실행계획안을 작성할 것을 위임하고 이를 위해 내년 7월까지를 시한으로 하는 위원회를 마치 인터넷가버넌스 워킹그룹처럼 다시 구성하도록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긴급하게 돌아가는 세계 인터넷 관리구조에 대한 설계과정에서 소위 정보통신 선진국 코리아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분명한 것은 한국은 이러한 논의의 한복판에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봐도 (그것이 정부이건 시민사회단체이건)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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