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0호 기획
‘문화다양성 협약’의 배경과 의의
문화의 사유화와 상품화에 대한 반격

최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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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0일, 제33차 유네스코 총회 본회의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아래 ‘문화다양성 협약’)’이 찬성 148, 반대 2(미국, 이스라엘), 기권 4(니카라과, 라이베리아, 온두라스, 호주)의 결과로 공식 채택되었다. 각국의 문화진흥을 위한 문화정책을 국제법으로 보장하고,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국가간 문화교류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문화다양성 협약은 극단적인 문화산업의 독점과 문화획일화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문화와 무역이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은 대중문화가 점차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문화상품’의 국제교역에서 마찰이 빚어지면서부터이다. 문화 역시 일반상품과 같은 범주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과 문화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통상협정의 협상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다른 나라의 주장이 대립하여 왔다. 이러한 논쟁은 가트(GATT, 1947), 도쿄라운드,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세계무역기구 도하개발아젠다(WTO DDA) 서비스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문화분야에 대한 다자간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다자간 합의가 여의치 않자 개별 국가와의 협상을 통해 문화시장 개방을 관철시켜 왔다. 일례로 스크린쿼터를 인정하는 가트의 조항은 현재까지도 유효하지만 미국은 개별국과의 협상을 통해 끈질기게 스크린쿼터제 폐지에 매달려왔다. 이탈리아의 경우, 미국과의 11년에 걸친 협상 끝에 1962년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였다. 덴마크는 1975년, 영국은 1985년, 스위스는 1993년에 각각 동 제도를 폐지하였다. 1998년 이래로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 대한 스크린쿼터 폐지 압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이 양자간, 지역간 자유무역협정(FTA)을 대외 통상전략의 핵심으로 활용하면서 다자간 무역협상의 진통을 피해가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경제적 세계화의 급속한 확대와 미국의 개별협상 전략은 문화산업의 독점을 더욱 심화시켜 왔다. 산업적 규모가 큰 시청각서비스(영화, 방송, 음반 등)의 경우 미국에 기반을 둔 거대 미디어기업들이 전세계 시장의 70% ~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극단적인 독점은 개별 공동체의 문화생산의 기반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기반마저 무너져 버리는 위기상황이 빈국, 개도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타 선진국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 획일화’의 재앙을 막을 대안 마련이 요구되었다. 1998년 캐나다 문화유산부의 제안으로 각국의 문화부처 장관들이 모여 '문화정책에 관한 국제네트워크(INCP)'를 창설, 대안 모색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이 네트워크의 창설을 전후로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와 같은 국제문화비정부(NGO)기구들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8년에 걸친 지난한 노력 끝에 국제사회는 드디어 지난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다양성 협약’ 채택이라는 소중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협약의 주요 내용과 의의
협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전문 18항은 정체성, 가치, 의미를 전달하는 문화활동, 상품 및 서비스는 경제적 속성과 함께 문화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상업적 기준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촉진된 세계화의 과정이 문화간 상호작용의 강화를 위한 전례 없는 여건을 제공하는 한편, 부국과 빈국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문화다양성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며,”라는 내용의 19항은 세계화의 과정이 문화교류의 충분한 여건을 제공했음에도 실재로는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본 협약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제1장 목적과 지도원칙]에서는 국가는 문화다양성을 위한 정책과 조치를 유지, 채택, 실행할 주권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제4장 당사국의 권리와 의무]에서 특히, 6조는 다양한 컨텐츠쿼터제와 독립문화에 대한 지원,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 공공적 성격의 문화 인프라 구축, 예술가와 창조활동에 종사하는 인력 양성에 대한 지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또, 11조는 문화다양성 증진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을 인정하고, 협약의 실행에 있어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장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2조 ~ 19조는 주로 국제적 차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12조), 개발도상국의 문화산업 강화(14조)와 개발도상국의 예술가, 문화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우대 조치(16조), 특히 국제 문화다양성 기금의 설치를 통한 경제적 지원(18조) 등을 명시하고 있다.
최대 쟁점이 되었던 [5장 다른 협약과의 관계] 20조는 다른 협약과의 상호보완 형성과 함께 다른 협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문화다양성 협약의 관련조항을 고려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다른 국제협약의 문화에 관한 조항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존 협약의 의무를 존중함과 동시에, 다른 협약이 문화를 다룰 때 문화에 대한 권위 있는 준거인 문화다양성 협약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적어도 문화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문화다양성 협약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밖에 [제7장 최종 조항] 25조는 문화 분야에 대한 국가간의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의 해결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당사국 사이의 교섭이나 제3국의 중개를 통한 분쟁해결을 권고한 후, 이러한 방식으로 분쟁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문화다양성 협약이 갖는 의의를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각 국가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는 정책 및 조치를 유지, 채택, 실행할 수 있는 주권을 보장하였다. 둘째, 정체성과 가치,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문화활동, 문화상품 및 서비스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국제법으로 확인하였다. 셋째, 개발도상국들이 문화표현의 다양성을 증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선진국의 지원을 포함한 국제협력 강화를 규정하였다. 넷째, 비종속성의 원칙, 즉 협약의 국제법적 지위가 통상협정을 포함한 다른 국제협약의 지위와 동등함을 강조하고, 다른 국제협약에 가입할 때뿐만 아니라 이미 가입한 협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도 문화다양성 협약의 조항을 고려할 것을 명기하였다. 다섯째, 분쟁해결 절차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문화 분야의 분쟁을 시장의 논리가 아닌 문화의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합의된 원칙을 마련하였다.
97년부터 시작된 고민과 토론, 민간기구와 정부기구, 국제기구가 각자의 위치에서 역량을 발휘하며 이루어 왔던 협력,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압력이 조금도 관철되지 않았던 논의와 표결을 거쳐 온 문화다양성 협약의 채택과정은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협약 채택 과정에서 대안 세계화의 가치가 전면적으로 구현되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협약 채택을 주도하고 있는 그룹들은 ‘세계화의 재조정’이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협약 채택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문화다양성 협약의 채택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사유화, 상품화하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무차별적인 확산 앞에 예외가 있을 수 있고,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출발점으로 조직해 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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