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1호 기획
호주제 폐지, 올바른 신분등록제로 이어질까
- 다양한 가족형태 인정, 개인정보 보호의 의미 살려야

늘 / 언니네트워크   neulsw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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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이면 호주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지 만 1년이 된다.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36조 제1항에 위반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호적법을 조속히 개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인 3월 2일, 총 투표인원 235명 중 161명의 국회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민법개정안이 가결되었고, 3월 31일에는 민법개정법률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호주제는 한시적으로 존속되고 있는데, 2008년 1월 1일까지 현행 호적법을 대신할 새로운 신분등록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법원에서는 '신분관계의 등록 및 증명에 관한 법률안(이하 대법원안)'을, 법무부에서는 '국적 및 가족관계의 등록에 관한 법률안(이하 법무부안)'을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로 제안하였다. 대법원과 법무부에서는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관계(이 때 부부 중 1인이 '기준인'으로 지정된다)를 기본으로 하는 가족부와 개인이 각각 하나의 신분등록부를 가지는 1인 1적부의 장점만을 혼합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제시한 법률안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2월 29일에는 열린우리당 의원 43인의 공동발의로 대법원안을 기초로 하는 '신분관계의 등록 및 증명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며, 현재는 신분등록 업무의 성격과 관장 부서 등의 문제를 놓고 당정간 협의가 진행 중이다. 여당과 정부는 가까운 시일 내에 업무의 연속성, 개인정보보호의 필요성, 호주제 폐지의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결정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그러나 법무부안과 대법원안은 종전의 호적법이 개정되기까지의 문제 의식을 이어가고 발전시키기는커녕 호주제 폐지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개인 정보를 수집하며 혈연과 이성애로 구성된 가족 관계만을 가족으로 인정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다른 가족들을 모두 배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 호적제에서 끊임없이 지적되고 비판되었던 내용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말만 슬쩍 바꿔 놓았다. '새로운 신분등록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없애랬더니 말만 바꿔놓은 ‘가(家)별 편제 방식’

대법원안과 법무부안에서는 각각 '기준등록지'와 '등록준거지'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본적을 대체하는 개념이지만 자신의 의사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으로서, 개인의 생활권을 기준으로 한다. 두 안에서는 기준등록지(또는 등록준거지)에 따라서 개인의 신분에 관한 모든 사항을 기재한 '신분등록부(대법원안)'나 '국적 및 가족관계 등록부(법무부안)'를 작성해야 하며, 목적별로 발급되는 모든 증명서에도 기준등록지(또는 등록준거지)를 기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에서는 각종 사건을 관할할 법원을 결정하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준등록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이 자신의 주소지를 국가에 신고하게 되어 있으며 관할 법원의 결정 기준도 본적이 아닌 주소지로 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왜 이러한 이유를 대는 것일까? 아예 없어도 될 기준등록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바꾸는 절차가 종전의 호적 변경 절차에 비해 간소해졌다고 말하는 것도 궁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두 안 모두 가(家)별 편제를 기준으로 본적 개념을 만들었던 종전의 호적법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 아닌가.

불필요한 주민등록번호 사용, 취약한 개인정보 보호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는 것 역시 문제다. 주민등록번호는 성별과 생년월일, 출생 신고를 한 행정구역 등의 개인 정보를 숫자로 코드화한 것이다. 현재 인터넷을 중심으로 주민등록번호 도용의 문제가 점차 큰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법무부안과 대법원안이 식별자로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하려 하는 것은 주민등록번호의 과다한 수집을 줄이자는 정부의 방침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반드시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해야 할 중대한 이유나 필요가 없음에도 행정상의 편의를 앞세우는 법무부와 대법원의 자세는 실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잠시 언급한 '신분등록부'와 '국적 및 가족관계 등록부'도 지적할 만 하다. 이 문서에는 성명, 성별, 본, 출생연월일, 주민등록번호, 신분 변동에 관한 사항 외에도 규칙(법령)이 정하는 신분 관련 사항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듯 개별 정보를 통합해서 관리하는 것이 국제적인 개인정보 보호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는 끊임없이 이러한 시도를 계속하는 것일까? 모든 자료를 하나의 파일에 집대성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더욱 용이하게 하겠다는 심보에서 비롯한 것 아닐까? 심지어 법무부안에서는 목적별로 증명서를 발급하는 동시에 ‘상세 증명서’라는 것을 따로 두어 다른 목적별 증명서의 내용을 모두 기재해 놓겠단다. 그렇다면 목적별 증명서는 굳이 뭐하러 발급하는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아닌가.

여전히 강력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더더욱 심각한 것은 두 법안이 가족에 따른 차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경우 출생신고서(대법원안)나 혼인신고서(법무부안)에 그 취지와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는 규정이나, 혼인 외 출생자를 신고할 때 어머니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못박은 것은 이른바 ‘정상가족’ 이외의 가족 형태나 가족 구성원에 대해 이 사회가 취하고 있는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전히 가부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가족만을 일반적인 가족 형태로 인정하고 그 가족 내에서 출생한 구성원만을 정상적인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 그렇지 않은 형태의 가족이나 구성원에게 특별 규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호주제 폐지의 의미를 이어나가겠다는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며, 출생에서부터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두 법안 모두 ‘가족증명서’의 내용을 부모와 배우자, 자녀 등의 성명, 주민번호 등으로 구성한 것, 증명서 교부를 신청할 수 있는 본인 외의 대상을 배우자, 직계 혈족, 형제 및 자매만으로 제한한 것 역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실제적으로 내가 다른 형태의 가족을 구성하여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이성애를 통한 혼인이나 혈연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면 ‘가족’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무부안과 대법원안은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상가족 이외의 가족에 대해서는 차별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이외에, 법무부안에서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주장하며 신분등록제와 관련된 업무를 맡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적할 만 하다.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부가 이 업무를 주관하게 될 때, 광범위한 개인 정보를 범죄 수사에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공권력의 관리와 감시 하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인권 침해의 소지도 다분하다.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신고와 증명에 관한 법률 제안

이렇듯 많은 문제와 한계를 지닌 법무부안과 대법원안에 문제 제기하며,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에서는 ‘출생·혼인·사망 등의 신고와 증명에 관한 법률’을 제안하고 있다.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 위한 공동행동 공동선언 참여하기
공동행동은 2003년 3월에 만들어져 호주제 폐지와 개인별 신분등록제의 도입을 주장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 온 ‘목적별신분등록제실현연대’가 호주제 폐지 이후 더욱 많은 단체 및 모임들과 뜻을 모으고자 재정비한 연대체다. 자료집 제작 및 배포, 기자회견과 간담회, 공청회, 기자 설명회 등을 통해 목적별 신분등록제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호주 혹은 호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가족 구성원의 지위로 신분을 증명하는 현행 호적 제도로 인한 피해 사례를 수집하여 호적제도 피해사례 증언발언대를 개최하기도 했다. 현재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민주노동당, 진보네트워크센터,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운동사랑방,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언니네트워크 등의 단체가 함께 하고 있다.

공동행동에서 제안한 ‘출생·혼인·사망 등의 신고와 증명에 관한 법률’은 본인을 기준으로 한 목적별 편제를 기본으로 한다. 출생이나 혼인, 사망 등의 목적에 따라서 신분 사항을 신고하고,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항이 기록된 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혼인에 관한 사항이 나타나 있는 혼인부의 경우, 현재 혼인 상태에 대한 내용만 들어가 있을 뿐 그 이외의 다른 사항은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 목적에 꼭 필요한 상황만을 상황에 꼭 필요한 정보만을 기재함으로써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개인이 자신의 정보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본적 개념은 전면적으로 삭제하며, 개인식별자로 주민등록번호 대신 공부기재번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사용에 대한 우려도 없다. 또한 공부기재번호를 통해 가족 사항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가족의 인적 사항을 서류마다 기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현재 공동행동에서는 임시국회에서 진행될 법안 심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 ‘호적제도를 대체할 목적별 신분증명제도 도입을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인터넷을 통한 공동선언을 진행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 이후의 성과를 이어가서 개인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헌법의 이념을 실현하고 프라이버시권을 보장하며 다양한 가족 형태를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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