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1호 영화
머리 아프지만 신선한 적응 노력, <어댑테이션>

시와 / 영상미디어 활동가   fjt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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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과 적응의 의미를 가진 단어 ‘adaptation’을 제목으로 내민 영화 <어댑테이션>은, 영화 <어댑테이션>의 ‘각색’이 장르영화의 공식을 답습하여 성공에 도달하라고 속삭이는 헐리우드 풍토 하에서 어떤 ‘적응’ 과정을 거쳐 탄생하였는지를, 적응되지 않은 각색으로 펼쳐낸 영리하고 의미심장한 영화이다. <어댑테이션>(2002)은 불가능하리라 믿어왔던 육체로부터의 이탈, 갇혀진 사고로부터의 탈출을 자극하며 기묘한 세계로 안내하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감독)와 찰리 카우프만(작가)이 다시 손잡아 탄생했다.
#1 “내 머릿속에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 역)은 <존 말코비치 되기>로 단번에 아카데미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지만, 스스로를 뚱뚱하고 소심하다 여긴다. 작가로서의 자질 역시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쉼 없이 책망하는 그는 뉴요커 잡지 기자 수잔 올린(메릴 스트립 역)이 쓴 논픽션 베스트셀러 <난초도둑>의 각색을 맡는다. 찰리는 난초의 매력을 부각시키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작심하며 각색에 착수하지만, 원작의 ‘신성함’을 훼손시킬까 전전긍긍하며 어느새 수잔과 상상의 교감을 나누는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좌절감과 고통이 뒤섞인 본인의 창작 과정을 시나리오에 써 내려간다. 한편 그런 찰리 곁에는 낙천적이며 자신감에 차 있는 쌍둥이 동생 도날드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 역)이 있다. 찰리는, 자신도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헐리우드의 패턴에 충실한 유명 강사로부터 지도를 받는 도날드를 일관되게 무시하지만, 도날드의 시나리오가 거액의 돈을 받고 팔리자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2 “인생에는 유령난초가 널려 있다.”
<난초도둑>은 유령난초를 찾아 오지를 떠도는 모험가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 역)의 인생 역정, 전형적인 중년의 뉴요커로 안락한 삶을 누리던 저널리스트 수잔이 존과 만나게 되며 열리게 된 감정의 우물을 그린 책. 지저분하고 괴짜인 취재 대상으로 존에 접근했던 수잔은 스스로의 삶에 빈 구석이라 여겼던 그의 야생성과 열정에 빠져들며 차차 그와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난초도둑>의 마지막 장은 “허무한 환상은 잡을 수 없다.”고 마침표가 찍혀 있다.

이렇듯 <어댑테이션>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축의 서사를 교차편집으로 병치한다. 수잔을 향한 찰리의 선망, 존을 향한 수잔의 갈망을 세심한 결로 다루면서 구원의 대상을 찾아 헤매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하는 듯 하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낌새를 알아챈 찰리와 도날드가 수잔의 뒤를 밟게 되면서 평행선을 달려왔던 두 이야기는 포개어지고, 마약, 포르노그라피, 자동차 총격전, 형제간의 화해 등 영화의 식상한 패턴들이 등장한다. 혹은, 진정성 어린 직관력이 엿보인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전반부의 일부 내용들은 사랑, 이기심, 원망이 어우러진 충격적인 한방으로 반전된다.

<어댑테이션>의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푸우만의 재간은 엔딩크레딧을 유심히 살펴봐야 파악할 수 있다. 그는 가상 인물인 도날드 카우프만을 자신과 함께 <어댑테이션>의 공동작가로 버젓이 이름을 올린다. 즉 익숙한 헐리우드 공식을 답습한 시나리오로 작가로 대성한 영화 속 캐릭터 도날드 카우프만이 전형적인 상황 설정이 연이어진 <어댑테이션>의 대미를 써내려 간 것으로 트릭을 부린 셈이다. 이로써 찰리 카우프만은 상업성에 기대어 공식에 안주하려는 헐리우드의 보수성에 유쾌하게 일갈하면서 실험을 감행하려는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생과의 진심어린 화해 이후 <난초도둑>의 각색을 맺을 수 있었던 영화 속 찰리의 장밋빛 나레이션으로 <어댑테이션>의 마무리를 택한 것에서 엿보이듯 긍정으로 무장한 도날드의 캐릭터가 지닌 밝은 빛을 기꺼이 포용한다.
<어댑테이션>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관객에게 적잖은 혼란스러움을 던지는 동시에 지적 호기심을 충만하게 자극한다. 찰리 카프우만은 물론, 도날드 카프우만을 제외한 <어댑테이션>의 주요 등장인물인 수잔 올린, 존 라로쉬 등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실제 존 라로쉬를 다룬 수잔 올린의 논픽션, <난초도둑>의 각색을 의뢰받은 찰리 카프우만의 작업이 <어댑테이션>으로 화한 셈이다. 인간 심리에 대한 세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열등감에 시달리며 자문자답을 읊조리는 창작자의 보편타당한 고뇌를, 전형적인 각색의 공식을 배반하며 풀어낸 희귀함과 창조력이 돋보이는 영화. 꽤나 머리 아프게 읽어야 할 성찬같은 영화이지만, 이야기에 관한 진부한 틀을 벗어 던지고 상상력을 한 뼘쯤 확장해보라고 독려하는 매력이 강렬하다. 자연스럽게 느껴보고 한땀한땀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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