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1호 칼럼
WIPO 개발의제 토론의 세 가지 장면

전응휘 / 평화마을 피스넷 사무처장   chun@peacene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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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계속해서 이 기구의 사업 방향에 “개발의제”(development agenda)를 포함하도록 개정하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 논의의 취지는 개발도상국들의 개발(development)을 위해 사업의 내용을 개선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적 권한(private rights)인 지적재산권 보호 일변도로 이루어져 왔던 이 기구의 모든 논의내용에 공공이익(public interest)을 위한 정책적 고려를 포함시키자는 것으로, 이것이 실현되기만 한다면 이제까지의 지적재산권 개념에 대한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론 그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은 아니다. 최근 유엔 관련 논의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미국은 개도국들의 이러한 요구를 전혀 수용할 생각이 없고 일본 또한 충실하게 그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개도국들과 협상을 해 볼 수는 있다는 입장이지만 협상의 폭을 그렇게 넓게 열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를 지켜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첫째는 미국이 개도국들의 개발의제에 대한 요구를 비판하면서 기존의 WIPO에게 위임되어 있는 내용을 충실히 수행해 가면 그것이 결국 개발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된다며 WIPO는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기구임을 강조했을 때, 이에 대해 거의 40분 가까이 철학적인 반론을 제기하던 브라질 대표의 비판내용중의 한 대목이다. 그는 지적재산권은 배타적인 사적 권리이기 때문에 시장개방을 통해서 자유경쟁을 하자는 시장의 논리에서 본다면 반경쟁적인(anti-competitive)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공정경쟁(fair competition)의 상태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WIPO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당신들의 논리맥락에서 본다면) 개발이란 공정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논박이었다.
미국의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재미있는 반론은 미국이 지적한 개발도상국에서 위조품(counterfeiting)과 불법복제품(piracy)이 사용되는 정도와 개발과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자는 제안에 대한 어느 아프리카 대표의 반박이었다. 앞서 브라질 대표는 위조품이나 불법복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개도국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그런 것을 조사하는 것은 WIPO 고유의 할 일이 아니라고 반박한 반면, 이 아프리카 대표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의 프로듀서들은 예외 없이 위조품이나 불법복제품을 쓰고 있는 셈인데 뭘 가지고 위조품이나 불법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계도서관연맹 대표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녀는 미국은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것만이 개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개발을 위해서는 그것 못지 않게 인적자원개발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개발도상국에서 양질의 인적자원을 개발하려면 결국 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정보지식자원을 어떻게 제대로 공급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저작권의 예외나 제한을 어떻게 허용하느냐 하는 법제도와 정책의 문제와 연관되며 WIPO가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 모든 사람이 저작권자의 허가나 승인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정보, 지식자원)을 보호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고정관념을 조그만 바꾸면 훨씬 더 진실이 잘 드러나 보인다.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관념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거의 맹목적인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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