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2호 달콤쌉싸름한페미니즘
한국 기층 남성들의 이해와 베트남 신부, 그리고 소위 진보언론

권김현영 / 언니네 운영위원   sidestory101@empal.com
조회수: 6993 / 추천: 81
여기, 한 진보언론의 광고면
2월 25일 토요일, 한겨레 신문 사회면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광고사진> 이 홍보문구는 하나같이 남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뭐 다 아는 얘기다. 사실 여성들도 말 잘 듣고, 돈 많이 벌어오며, 잘생기고, 영특하고, 검소하고, 정조관념 투철한 남성을 원할 수 있다. 이상형을 이야기하는 거, 자유다.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
광고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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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혹은 너무 가부장적이어서

그런데, 문제는 이 광고가 무섭도록 현실적인 데다가 심지어 간단하게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베트남 신부를 원하는 남자들은 적게는 천만원에서 많게는 이천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신부를 “사오는 것”이 가능하다. 국제결혼중계업체들은 신부선택에서 결혼성립, 신혼여행까지 1주일이면 된다고 선전한다. 만난 지 5일째가 되면 중계업체들은 합방을 주선한다. 어떤 여행사는 2번 갈 필요도 없이, 1번이면 충분하다고 경쟁력을 내세운다. 뿐만 아니다. 올해부터 김해시는 국제결혼을 희망하는 관내 35세 이상 농촌총각을 대상으로 결혼에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각 600만원씩 지원키로 했다고 한다.

결혼이 노골적으로 시장경제논리를 따르면서, 이성애자 하층계급의 나이든 남성들은 점점 결혼하기 어려워졌다. 남자 혼자 사는 것, 특히 하층계급 남성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상태는 사회적 “위험상태”로 간주된다. 바둑 9단 서봉수 기사는 베트남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바둑계 원로들로부터 바둑계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욕을 먹었다. 외국 여성과 결혼하면 곧 무능력한 남성으로 취급받는 낙인은 그들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내 이들의 계급, 나이, 지역적인 차이에 따른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상을 비판적으로 쓰기 위해 많은 감정 노동을 했다.

해결하지 않는 해결

하지만, 이들은 전혀 여성들에게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내에게 그런 배려나 눈치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국제결혼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나 하나 먹고 살 수야 있지만 아내를 부양할 만큼은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의존적인 여자들이 결혼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말이다. 그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부모 잘 모시고, 남편에게 헌신하며, 근검절약하며, 순종적인 아내를 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촌 총각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촌의 빈곤화와 나이 및 지역차별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농촌 총각을 베트남 신부와 연결하는 건 보다 간단하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성차별주의를 없애지 않고 지원금을 지급하면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성차별주의는 그 자체로 남성들의 권리이자 삶의 질로 “인간화”된다. 나이든 농촌 총각의 요구에 대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그들을 타자화 시키면서 말이다.

반면 이성애자 하층계급 나이든 여성들이 결혼을 (원해도) 못하는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남자 혼자 사는 건, 남자와 가족, 사회와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만, 여자 혼자 사는 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단 애를 못 낳으면 문제가 된다.) 왜? 여자는 혼자 살아도 잘 살기 때문이며,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의 문제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그 “여성 개인”의 능력 문제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아니 차라리 인간적인

한겨레
그리고 더 괴로운 것은, 아니 차라리 고통스럽기까지 한 이유는 이 광고가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 있는 한겨레신문에 실렸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같은 신문은 굳이 이런 광고를 “품위없게” 실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겨레가 할 변명은 아마도 간단할 것이다. (광고주가 없다. 돈이 없다. 신문 망한다.) 예전에 종군위안부를 위한 일본의 민간기금 광고를 실었을 때도 같은 변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존이냐 품위냐'라는 갈림길에서 생존을 선택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한 이 진보언론의 변명은 모든 인간적인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남성적인 기준에서 사고되고 있으며, 얼마나 점점 모두에게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도 씁쓸하지만 예상 가능한 답변이다.

한겨레는 뭐 하나 뺄 것 없이 “기층 남성”의 이해를 대변하는 남성·민족·자본 신문으로서, 자신의 신념대로 나간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베트남 참전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신문에서, 베트남에 가서 신부 구해오자는 광고를 싣는 건, “미안해, 그럼 결혼해줄게”라고 말하는 가해자들하고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라리 둘 중 하나는 그만두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하는 충고다. 그렇게 살다가는 미치거나 괴물이 될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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