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3호 표지이야기 [주류를 위협하는 대안적 소통의 모색]
찌질이의 세계, 찌질이의 소통

장귀연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수료   rosa1971@jinbo.net
조회수: 11550 / 추천: 67
나는 때로 잠자는 시간 포함하여 24시간 인터넷 브라우저를 풀가동하고, 네이버 댓글 수백개를 보면서 낄낄거리고, 그리하여 인터넷상의 소문들을 실시간 체크 가능한, 인터넷 폐인이란 점을 민망하지만 고백해야겠다. 그런 입장에서 관찰해 보면,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는 달리, 네티즌들의 소통 연계망은 나이, 학력, 계급 등을 따라 분할되는 경향이 크다.
네이버 블로그의 이웃맺기나 싸이의 일촌맺기로 구성되는 연계망들을 살펴보면, 연령과 학력과 계급을 따라 분할 형성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연령이나 학력과 같은 정체성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들렀다가 맘에 들어 이웃 맺고 가는 사람들조차 나중에 알고 보면 대개 비슷한 연령층, 비슷한 학력, 비슷한 계급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기 마련이다.
전혀 그런 것과 상관없을 것 같은 취미 동호회조차 그러하다. 나는 야구팬동호회 사이트와 판타지소설동호회 사이트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데, 차츰 회원들의 신상을 알게 되면서 참으로 의아했던 것은 “한국 인구 중에서 서울대 출신의 비율이 이렇게 높았나?”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가입해 있는 야구팬동호회와 판타지소설동호회에서 그 비율은 매우 높았다.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야구팬동호회와 판타지소설동호회들 중에서 내 마음에 들어 내가 가입해 활동하게 된 곳은, 결국 나의 아비투스와 맞아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유유상종은 온라인에서도 재생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터넷 폐인이다 보니, 유유상종으로 참여하진 못하더라도 ‘찌질이’들의 세계를 눈팅하는 일은 적지 않다. 네이버 찌질이, DC 찌질이들 등등 말이다.
‘엘리트’와 ‘찌질이’의 차이는 내가 자주 죽치곤 하는 두 야구 사이트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내가 가입한 야구팬동호회 사이트는 가입시험도 보고, 야구전문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관리자가 물관리도 철저히 한다. 욕설이나 싸움은 찾아볼 수 없고(그러면 강퇴니까), 맞춤법 틀리면 바로 지적당하고, 지나친 이모티콘 사용도 금지되어 있다. 각종 전문적인 분석과 논리적인 글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비록 야구를 좋아하더라도 지식이 별로 없거나 글재주가 없는 사람은 눈팅을 할망정 글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 다른 곳은 네이버 야게(야구게시판). 이곳은 도대체 3줄 이상 넘어가는 글을 보기 어렵고, 이른바 ‘낚시’는 곳곳의 지뢰밭이며, 욕설을 안 섞으면 자판 두드리는 손가락에 티눈이 박이는 줄 아는 거 아닌가 싶다. 싸움과 다굴은 일상다반사요, 대개의 진행상황은 시시껄렁한 걸 갖고 서로서로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처음엔 진짜 ‘초딩’들의 모임이 아닌지 의아해했다가, 조금 지나서 이용자들의 신상정보를 짐작할 수 있게 되자 경악했다. 멀쩡한 성인들이 이 무슨 정신병자 같은 짓들이람? 과연 네이버 찌질이라는 말에 값하는구나!
‘엘리트’들이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는 ‘인터넷의 대중’이란 이런 찌질이들이다. 편 가르거나 다굴 놓는 데 잔인하기 그지없으며, 논리적이고 진지하게 말할수록 오히려 씹히기 십상이요, 양식(良識)은 옥션에 팔아먹은 듯 하고, 생각이란 1초도 안하고 사는 것 같은... 그리하여 말초적인 선동에 부화뇌동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실은 ‘놀이’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내겐 욕설로 읽혔던 것은 농담이었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잡담을 하며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이었고, ‘낚시’만 난무하는 듯 했지만 자세히 보면 재밌는 정보들을 교환하고 있었고, 무례한 표현에도 배려의 기준이 있었고, 막 나가다가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순간 반성으로 돌아섰다. 이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감탄했다. 진지하고 논리적으로 말하지 못하지만, 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찌질이’들은 개념을 옥션에 팔아먹은 것도 아니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언어와 놀이의 방식으로 자기 생각들을 교환하고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유상종에 기대어 하는 말인데, 이른바 황우석 사태 때 아마 네트워커 독자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DC과갤(디시인사이드 과학갤러리)보다는 BRIC의 글이 더 읽기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BRIC의 글들은 논리정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논쟁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반면, DC과갤에도 그런 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수히 올라오는 글들 중에 뭐가 내용있는(?) 글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낚시’글들, 세줄짜리 글들, 농담이나 잡담들, 욕설이나 비아냥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진지하게 참여해 보려고 하자마자 페이지는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여기서는 꼭 “횽아들”로 호칭해야 하는 건지, “병설리”라는 리플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첫눈에는 혼란스러운 홍수로만 보인다. 이곳은 DC찌질이들의 놀이터, 그들의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문적이고 논리적이며 물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BRIC보다 이 찌질이다운 표현이 홍수를 이루던 DC과갤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무례하고 시시껄렁하고 쓰잘데기 없는 잡담과 농담들을 나누는 중에, 실제로 사고하고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냥 “진실이 궁금하다” 정도가 많았다. 잡담과 농담을 나누면서 파시즘이나 국수주의에 대한 얘기까지 나아간다. 월드컵 열광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로 이야기가 새기도 한다. 황우석이 문제인 이유는 거짓으로 국익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국익 논리는 똑같이 국수주의의 위험이 있다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정색하고 진행되지 않는다. 잡담이나 유머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사고와 성찰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더 변모했다. 사태가 진행되면서 DC과갤에 이른바 ‘황빠들의 러쉬’도 많이 들어왔다. 그에 대해서 같이 맞욕설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오직 한 마디 리플, “병설리~” 그리고 황빠들을 패퇴시킨 것은 이 리플이었다.
아,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찌질이들이란 게 “어리고 무식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DC과갤에서도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것은 일종의 소통방식을 의미한다. 굳이 논리적일 것도 정색할 것도 없고 맞춤법이 정확할 필요도 없이, 그런 걸로 주눅들 필요 없이, 잡담하고 농담하고 놀면서 소통하는 것.

우리가 진보블로그나 참세상과 같은 사이트에 갇혀 유유상종하고 있을 때, 전혀 진지하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생각도 줏대도 없고 개념을 팔아먹은 듯한 네티즌들의 한심함을 한탄하고 있을 때, 찌질한 방식으로 찌질이들과 함께 소통하고 성찰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지음님(http://blog.jinbo.net/antiorder/?pid=33)이 표현했던 그대로, “대중운동이닷! 오랜만에 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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