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3호 달콤쌉싸름한페미니즘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 젠더사회에서 여성의 나이 듦

시타 / 언니네트워크 운영위원   sitafight@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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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아줌마!! 기다리라니까!!” 고층아파트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늦게 오는 친구를 기다리다가 너무 늦어져 미안한 마음에 그냥 ‘닫힘’ 버튼을 누르려 하자, 그 엘리베이터에 동승하고 있었던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어차피 늦었으니 그냥 마저 기다리자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싸늘한 눈으로 뒤돌아보자 움찔한 그 남자가 머쓱한 듯 중얼거리던 말. “어, 아줌마가 아니라 아가씨인가?”
상황 종료된 지 10분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할말이 문장이 되어 나오는 분노처리속도의 느림을 원망하며 괜히 애꿎은 친구들한테 “아가씨건 아줌마건 왜 반말하고 지랄이야!”라며 길길이 날뛰어도 보았지만, 사실 몇 달이나 지난 이 장면이 아직 이렇게 생생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뒷모습이었다 해도, ‘아줌마’로 보였단 말이야? 라는.
사실 내가 ‘아줌마’라고 불렸던 첫 번째 경험은 따로 있다. 지난 여름 집에서 타는 냄새가 나서 소방서에 신고한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불이 난 것은 아니었고 다른 냄새가 난 것을 잘못 안 것이었다. 그때 도착한 소방관은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괜히 신고했다고 타박을 했는데, 나는 반말로 타박을 들었다는 것보다도 아줌마라고 불렸다는 것 때문에 더 충격 받았고,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또 한번 충격 받았었다. ‘아줌마’라는 아이콘으로 집약되는 나이든 여성에 대한 낙인과 비하를 나 또한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아가씨’와 ‘아줌마’는 누구에게 의미 있는 차이인가?

한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은 ‘아줌마’라고 불렸을 때 불쾌해 한다. 법률상 ‘기혼여성’인 사람조차 “아가씨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아줌마’보다 ‘아가씨’가 얼마나 존중받는 호칭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아가씨’여서 ‘아줌마’보다 좋을 게 뭔데? 나이가 적으면 적다고 무시당하고, 많으면 많다고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흥미롭게도, 6,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아가씨’라는 말은 술집 아가씨를 의미했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아가씨’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법률혼을 통해 기혼여성이 된 여성들도 ‘아가씨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6,70년대 여성들이 성적 서비스의 제공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싫어 ‘아가씨’라는 이름을 거부했다면, 90년대 이후 여성들은 가사노동자, 임신기계로 환원되기를 원치 않기에 ‘아줌마’라는 이름을 거부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노동이며 여성은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남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이 없거나, 가사노동을 하지 않거나, 자궁이 있는데도 출산하지 않는 여자들은 처벌된다. 레즈비언, 장애여성, 비혼여성은 ‘진짜 여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여성성을 위반했기 때문에 처벌, 훈육, 교정되어야 하거나, 혹은 여성성에 미달하기 때문에 ‘요보호 여성’으로 여겨진다.
‘군대 갔다 와야 남자 된다’라는 말에서 ‘남자’ 대신 ‘어른’을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은, 남성이 이 사회에서 온전한 성인 ‘개인’이 되는 것이 남성이라는 성별 정체성 획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이 ‘결혼 해봐야, 아이를 낳아 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아직 ‘어른’이 아니며, ‘어른’이 된 기혼 여성은 더 이상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아줌마’다). 결국, 어떤 집단의 개인들을 ‘여성’이라는 범주로 환원하고 또 위계화하는 성별 시스템과, 그 안에서 ‘진짜 여성’을 정의하는 권력을 문제삼지 않는 한, 아가씨/아줌마라는 성별화된 위계는 문제화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젠더 사회에서 여성이 나이 든다는 것

‘아줌마’라는 호칭이 왜 나에게 문제적이었는지를 고민하면서, 나는 ‘아줌마’라는 호칭이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문제적 현실을 반영한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나이와 젠더의 문제다. 서른이 넘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서른만 되 봐라” 라며 이를 갈다가 갑자기 ‘나이가 많아서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덜 된) 미성년에서 (너무 어른이 된) 중년으로의 순간이동이랄까? 이것은 아마도, 젊고 예쁜 여성만을 ‘진짜 여성’, 가치 있는 여성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듦은 ‘나이 든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공/사영역 시스템에 기반하여 여성을 사적 영역에 귀속된 존재로 정의하고, 그 경계를 넘었을 때 다른 평가를 하는 문제다. 이것은 여성의 존재를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기반하여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가령, 많은 남성들에게 ‘어머니’는 누구보다 숭고한,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존재인지 몰라도, 그녀가 가족 바깥으로 나와 공적인 장에서 보일 때는 쉽게 ‘아줌마’라고 부르며 비하하고 낙인찍고 경멸한다. 10대 여성에 대한 중년 남성의 대표적인 이중적 태도인 “딸 같아서”와 ‘원조교제’는, 가족 안에 있는 여성을 ‘딸’로서 훈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가부장의 권리와 가족 밖에 있는 여성을 ‘영계’로서 착취하고 사용할 수 있는 남성의 성별권력을 대표한다. 사적영역에서 딸-아내-어머니인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나오면 ‘영계’, ‘아줌마’가 된다.
셋째, 결혼제도에 이미 들어가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된 기혼여성과 결혼제도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미혼여성을 가르는 경계의 문제다. 가령, 나는 사실 ‘몸짱 아줌마’라던가 ‘미시족’ 같은 언어들이 사회적으로 부상할 때 이것을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비혼(非婚)으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결혼관계로의 진입을 기준으로 아가씨/아줌마, 미스/미세스를 나누는 것이 나와 무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정상적’인 라이프 사이클의 필수 요소다. 이 때 기혼/미혼의 구분은 어떤 면에서 ‘한 남자의 여자’인가 아직 ‘임자’가 없으니 연애/결혼 시장에서 ‘접근 가능한(available) 여자’인가 사이의 차이이기 때문에, 비혼여성은 어쨌든 결혼은 안 했으니 ‘접근 가능한’ 여자이거나, 아니면 ‘유효기간’(결혼적령기?)이 지난 여자로 간주된다. 어느 쪽이든 ‘비혼’이라는 존재성은 사라진다. 남성사회의 시선은 결혼 ‘바깥’의 여성에 대한 상상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나이듦과 늙음

그렇지만 물론, ‘아가씨’라서 받는 차별과 ‘아줌마’라서 받는 차별은 다르며, 나이주의(ageism)는 성별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새로운 차원의 분석을 필요로 한다. 나이듦과 늙음은 다르다. 우선, ‘늙었다’는 말에는 ‘나이듦’에서와 같은 존중의 의미가 없다. (“늙은 마귀할멈”은 자연스럽지만 “나이든 마귀할멈”이라는 표현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또, 나이듦은 삶을 관통하는 연속성, 지속되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을 환기시키며, 나이듦에 부정적 의미를 부착시키는 반대말을 갖고 있지 않다. 반면, 늙음은 항상 ‘젊음’이라는 반대말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말이며, 늙음과 젊음을 가르는 어떤 경계, 자원과 권력이 재분배되는 어떤 분기점을 상상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이분법과 위계화 없이는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근대이후 사회에서, 많은 언어들은 ‘반대말’ 없이는 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정상인’이라는 말이 ‘비정상’이라는 범주를 생산하는 권력장치인 것처럼, ‘늙었다’는 말 역시 ‘젊다’는 말의 특권을 생산하는 장치다. ‘늙음’이라는 말 자체가 ‘젊음’을 강조하는 위계 속에 위치해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이렇듯 나이를 특권화된 젊음에 대비되는 것으로 정의하는 연령차별주의가 작동하기 때문에, 늙음은 항상 무엇의 상실, 결여, 쇠퇴로 의미화된다.

함께 나이 들어갈 여성들의 의미공동체가 필요하다

20대, 30대, 40대 여자 연예인들이 차례로 나와서 주름개선 화장품을 선전할 때, 아픈 곳이 없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는 말을 들을 때, 일상적인 변화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늙어서 그래”라는 한마디로 일축할 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나이 제한이 있어 초조함을 느끼게 될 때, 나이는 나에게 억압적으로 다가온다. 젠더 사회에서 여성으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상실의 연속이자 초조함의 증가로만 연결된다면 너무 우울하다. 나는 이런 우울에 대처하는 방법들 중 하나가, 나이듦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생산하고, 이 이야기를 서로 지지하고 의미있게 만들어 줄 이야기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윗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작업해 왔듯이, 무엇을 할 수 없게 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가를 중심으로 나이듦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갈 친구들이 절실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인공 소피가 노인이 된 직후 “나이 든다는 건 좀 불편한 거구나”라고 혼잣말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기존 사회가 얼마나 (비장애인의) ‘젊은 몸’ 중심으로 디자인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사였다. 나는 이 대사가 참 좋았는데, 나이듦을 ‘젊었던 몸’의 상실, 슬픔, 애도로만 의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젊음 중심의 사회에서 오는 불편함에 대한 ‘깨달음’, 새로운 인식의 획득으로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여성주의 정치학이 내게 가르쳐 주었듯이, 자신이 경험하는 억압을 정치화할 때 나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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