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4호 영화
끽끽대는 경직된 관계에 유연한 기름칠하기
<가족의 탄생> 2006/113‘/김태용

시와 / 영상미디어활동가   fjt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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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포스터

관계라 불리는 모호하게 포괄적이고 상투적으로 회자되는 단어는, 무수한 정의와 대책없는 ? 마크를 동시에 가지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을 종횡무진 헤집어 놓기 십상이다. 연인, 친구 그리고 가족 등에 대한 통용되는 정의와 특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우리들은, 적당히 위장하고 적절히 타협하며 평온하면서도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거나, 각 관계의 ‘숭고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함을 결핍으로 치부하며 불안해하다가, 바로잡으려 안간힘을 쓰거나 끝이라 선언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양새가 관계의 전부이진 않을 터. 충무로에서 탄생하리라 예견되기 어려웠던 급진적인 레즈비언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김태용 감독이 6년 만에 선보인 신작 <가족의 탄생>은 친여성적인 감수성에 입각하여 관계에 관한 긍정적이며 유연한 사고의 발상을 제안하는 허황되지 않은 판타지이다.

<가족의 탄생>은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은 독자적인 완결성을 지니며 느슨하게 얽혀 결말에서 기묘하고 대안적인 가족의 탄생을 알린다.

영화 장면

첫 번째 에피소드. 5년 만에 불쑥 찾아온 남동생 형철을 설레임 가득한 태도로 맞이하는 미라. 그런데 남동생의 곁에는 이모뻘 됨직한 연상의 부인 무신이 서 있다. 범상치 않게 살가운 남매와 허허실실 인생역정이 쌓여 생겨났음직한 여유와 눈치의 완급 조절이 고단수인 무신, 사이좋은 연상연하 커플과 생활력 강하며 새침한 미라, 묘한 긴장감과 어색한 친근감이 공존하는 올케 ․ 시누이와 실없이 위풍당당한 형철. 이들 세 인물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름대로 알콩달콩 살게 된 이들 관계가 뜻하지 않은 손님의 방문으로 변화한다. 평면적이지 않은 캐릭터들과 배우들의 호연이 일품인 이 에피소드는 올케, 시누이, 입양녀가 이룬 어떤 가족의 실화에 모태를 두고 있다.

영화 장면

두 번째 에피소드. 선경은 붙임성 있고 친절한 태도로 목적한 바를 영악하게 이루는 여성이지만, 마음속에는 자주 남자를 바꾸어 사귀며 딸에게 별다른 애정을 쏟지 않는 엄마 매자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하다. 매자를 사랑한다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배다른 남동생에게도, 애정 어린 태도로 따뜻하게 대하는 한편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며 화풀이하기 일쑤이다. 달래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어버린 화를 쉽사리 다스리지 못한 선경의 마음은, 엄마가 심각한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도 계속된다. 엄마의 유품을 들추어보던 고요한 어느 날 그녀는 복받친다. 한 발짝 늦게 후회와 안타까움이 밀려들 것을 감지하면서도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의 실타래에서 상대를 향한 소중한 고백을 오롯이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익숙한 줄거리인냥 다가오지만, 마음바닥 깊숙이 숨어있던 정수가 걷어 올려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찾아오는 한때를 섬세하게 포착했다.

김태용 감독

세 번째 에피소드는 누구에게나 진심을 베풀며 천사같이 상냥한 여성 채현과 그런 애인이 못마땅한 경석의 상큼발랄한 연애담이면서, 앞선 에피소드들의 후일담이다. 감독은 연인 관계의 배타성과 유연함 등 해묵었지만 뾰족한 정답이 존재할 리 만무한 어려운 과제를 다시금 던지면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기보다는 각 인물들이 살아온 지난 시간과 처했던 조건을 존중하면서 이들을 유쾌하게 보듬는다.

결혼이나 혈연관계가 배제된 다양한 모양새의 가족이 등장한지 이미 오래지만 이들을 결손이라 규정짓는 더딘 현실의 발걸음만큼이나,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 재현되는 가족은 아직도 압도적으로 부부와 자식으로 이루어진다. <가족의 탄생>은 대책없는 쿨함의 종지부를 강요하는 몇몇 영화들과 달리, 상실감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애증이 뒤범벅된 채 갈등과 연민이 오락가락하는 마음결의 현주소를 외면하지 않는다. 평범한 듯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이 일굴 수 있는 유연한 가족에 대한 신선함, 누군가를 관찰하며 머물지 말고 다가가 함께 하기를 권하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따뜻한 믿음이 좋은 영화.


사진 출처 <가족의 탄생>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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