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4호 과학에세이
개미와 악어

이성우 / 공공연맹 사무처장   kambee@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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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수가 자유무역협정(아래 FTA) 교육을 하면서 말했다. 악어와 개미가 덩치에 비해 깨무는 힘이 세다. 그러니까 둘이서 번갈아가며 상대방을 한 번씩 깨물어주기로 하자. 그게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나. 한미 FTA는 이처럼 악어와 개미가 서로 깨물기 놀이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킥킥 웃었다. 악어의 큰 이빨 사이에 개미의 몸뚱아리 하나 숨기지 못하겠는가, 개미 한 마리 잡겠다고 연신 큰 턱을 앙다무는 악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이 쬐그만 땅덩어리 삼키려다가 미국이란 나라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그런데 현실은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미국 국제무역위의 시장조사보고서는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낱낱이 분석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기세이다. 그에 반해 우리는 아직 한미 FTA가 한국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각 분야별로 일일이 파악하지 못했다. 10개의 IMF가 한꺼번에 밀려오고 있다고 경고하지만, 공공서비스 부문만 하더라도 포괄범위가 너무 넓어서 세세한 분석과 대응방안을 마련하기에 아직은 힘이 부친다.

과학기술 분야는 어떨까? 한미 FTA가 과학기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수소문했다가 별 소득이 없어서 직접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 과학기술부 홈페이지에도 가보고, 과학기술 관련 시민사회단체 게시판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한미 FTA에 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과학기술은 한미 FTA의 무풍지대? 그러다가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펴낸 정책자료 한 편을 간신히 찾았다.

2004년 8월에 낸 <FTA 협상을 위한 과학기술관련 서비스 분야의 양허현황 분석>이라는 보고서였다. ‘한국・일본, 한국・싱가폴 FTA 협상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보고서의 흐름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세계무역기구(아래 WTO) 협정에서 한국, 일본, 싱가폴의 과학기술 양허와 요청 현황을 분석했다. 이를테면, 자연과학과 엔지니어링에 있어서 연구 및 실험개발 서비스는 3개 국가가 모두 양허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한국의 개방수준이 높다. 그러나 WTO 협정에서 개방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싱가폴) FTA로 들어가면 개방의 강도가 훨씬 높아진다. 따라서 FTA 협상을 할 때 다른 나라가 개방한 것만큼 우리 양허안을 제출하든지, 우리가 개방한 것만큼 다른 나라가 양허안을 제출하도록 하든지, 우리에게 양허를 요청한 나라가 자기 나라에서는 동일 분야에서 양허하지 않은 경우 동일분야 및 관련분야를 양허하도록 하든지, 잘 알아서 해라!

이게 뭐냐? 어렵사리 쓴 보고서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심하다. 그런데 이것이 한미 FTA에 직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준이고 현실이다. 차라리 과학기술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더 설득력이 있다. “미국 기술사 취득자(합격율 65-70%)는 국내에서 2차 면접시험을 통해 인정하고, 그보다 더 어렵게 시험을 통과(합격율 2-10%)한 한국 기술사 합격자는 미국의 제도와 다르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미국의 오만과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그들한테 구걸해야 하나. 당당하게 협상하라.” 아, 개미가 악어를 물어서 상처라도 입히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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