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6호 기획 [월드컵과 정보인권]
인종 차별은 안 되지만, IP 차별은 된다?
한국 네티즌이 FIFA에 ‘팽(烹)’ 당한 사연

홍지은 / 네트워커   idio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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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팀은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스위스 전의 패배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하지만, 한국인의 저력(?)은 2002년에 이어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거대한 붉은 물결이 출렁거렸던 거리 응원 이야기가 아니다. 스위스 전 패배가 엘리손도 주심의 편파 판정 때문이라는 주장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국제축구협회(FIFA) 홈페이지에 한국 네티즌의 항의 방문이 쇄도한 것이다. 이에 피파는 결국 한국에서 들어오는 아이피(IP) 접속을 차단해버렸다. 한국에서 피파 사이트 접속은 그 후 일주일 동안 불가능했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피파의 한국발 IP 접속 차단은 한 차례 더 이루어졌다. 피파가 발표한 7월 세계 랭킹에서 한국 축구팀의 순위가 29위에서 56위로 추락한 것을 두고 국내 축구 팬들의 항의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FIFA 홈페이지에 접속이 차단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

이번 일을 두고 네티즌의 무분별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피파의 조치 역시 정당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하겠다던 피파는 자신의 사이트에 접속하는 특정 국가의 IP 접속을 차단함으로써 또 다른 차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차별 대우가 훼손한 것은 한국 네티즌의 맹목적인 애국심이 아닌 '네트워크 중립성(Network Neutrality)'이다.

네트워크 중립성은 현재 미국에서 인터넷 정책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개념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흐르는 데이터에 대해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음을 뜻하며, 이는 지금까지 인터넷이 구축되어 온 기본원칙이었다. 네트워크 중립성이 훼손될 경우 거대 미디어 기업에 의한 독점과 검열이 인터넷 전반을 지배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오는 ‘인터넷 종량제’ 논란이 바로 네트워크 중립성과 관련된 것이다.

피파의 한국 IP 차단 조치 역시, 네트워크 중립성을 훼손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네티즌은 심판 판정에 항의하기 위해 접속한 것이었지 서버 다운을 목표로 사이트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모든 한국 네티즌이 단지 항의하기 위해서 피파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접속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피파는 IP 차단이라는 강경책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한국 네티즌은 차별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했다.

네트워크 중립성은 온라인 세계에서 네티즌이 누리는 ‘기본권’이다. 만일 과도한 접속으로 서버에 장애가 생길 정도로 부하가 심해졌다면, 회선 증설 등을 통해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합당한 대처이지, 특정 지역에서의 모든 접속을 차단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덧붙여, 축구 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서 있는 피파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그 팬들을 이렇게 배척해도 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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