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7호(200609) 영화
사랑니의 통증을 기다리다
사랑니 (정지우/2006/115분)

시와 / 영상미디어 활동가   fjt79@hanmail.net
조회수: 5506 / 추천: 74

* 가능하면 영화를 보고나서 읽어보세요~.



 


사실 주변에 이 영화의 주인공, 인영같은 친구는 별로 없다. 여백과 편안함이 배어있는 공간에서 유려한 동선으로 움직이던 나이 서른에 이른 그녀가, 일상에서 욕망을 채워나가던 모습들이 어떠했는지 사뭇 궁금했다.


침대에서 유영하다.


그녀는 분할된 칠판에 각종의 수식들을 빡빡하게 적으면서,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의자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향해 긴장된 시선과 낭랑한 목소리를 유지한다. 학원 수학 선생님인 그녀는 투피스와 두터운 화장을 거뜬히 소화한다. 이내 호젓하기 그지없는 고풍스러운 한옥으로 돌아오면, 러닝머신 위에서 부지런히 달리고 주름잡힐 시간에 대비하기 위하여 목에 크림을 바른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날고 싶을 때에는, 하늘과 가까운 옥상에 올라 맥주 한잔을 들이킨다. 그러면서도 병든 어머니를 정도껏 마음껏 돌본다. 자상하고 세심한, 여자친구의 독립적인 생활을 존중해주는 보기 드문 남자 친구와 동거한다. 또한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듯, 과거의 시간과 적당히 동거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를 부활시키고자 시도한다.
 


“어제 밤 비오는 거 몰랐지? 자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야.”


첫사랑이 주는 아릿함과 그리움, 보통 남자들이 추억한다는 판타지를 일반화시키는 건 확실히 좀 무리가 있다. 그런데 그녀는 ‘이석’을 추억한다. 어느 날, 이석과 이름도 얼굴도 똑같은 17살의 그가 나타난다. 흠뻑 비를 맞고 흔들리는 눈빛을 교환한 이후, 마음과 몸을 주고받는다. 그동안 멀리하던 패스트푸드점에서 룰루랄라 수다를 떨고,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조성모의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린다. 그녀는 쾌적한 모텔방에서 매끄럽게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는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키스하고 싶은 게 죄가 아니듯 그녀는 그렇게 욕망에 충실하고 현명하게 얻는다. 그런데 어느 날 과거의 이석이 찾아든다. 근데 17살의 이석과 하나도 닮지가 않았다. 담배 한대를 물고 맥주를 들이키며 고개를 흔들다가, 그녀는 17살의 이석과 연애한다.


“난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
 


양 갈래로 머리를 따고 회색 교복을 입고 때묻은 흰색 실내화를 신은 인영이 있다. 그녀도 이석을 그리워한다. 죽은 이석의 형과 친구였던, 이석의 형이 남몰래 좋아했던 그녀는, 이석을 찾아 서울행 기차를 탄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이미 커버린 인영이 있다. 그는 등을 돌렸고, 그녀는 훌쩍거린다.


사랑니의 통증을 기다리다


두 명의 인영은 누군가를 추억하며 이석을 만났지만, 그녀들이 맞닥뜨린 상황은, 그녀들이 취하는 태도는 그렇게 다르다. 영화는 비슷한 시간대에, 똑같은 이름과 생김새를 가진 인물들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을 마치 한 인물의 과거와 현재인 냥 착각하게 만든다. 두 명의 인영이 맞닥뜨리면서 이런 착각으로부터 빠져나오지만, 돌돌 돌아가는 세탁기마냥,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고 싶어 빌리는 교과서마냥, 겉옷 가리워진 맹장수술의 상처마냥 두 명의 인영은 실은 한 명이기도 하고, 백 명이기도 하다.
 


17살의 이석과 돌아온 이석과 동거하는 남자친구가 평상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들 때, 인영의 사랑니 통증은 최고조에 오른다.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의 고유함을 인정하면서, 대면한 관계의 현재를 직시하면서, 새로운 싹을 틔우기. ‘어린’ 인영이 ‘큰’ 인영이 되면 가능할까? 사랑니의 통증을 겪고 나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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