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8호(200610) 달콤쌉싸름한페미니즘
여성이 사라진 공간, 숨을 내어 되찾기
‘~님’이 ‘횽아’가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

난새 / 언니네트워크 운영위원   2nans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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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오랜 시절을 남자로 오해받으며 살아왔다. 아니, 살아가고 있다.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사회적 기준이란 놈이 원체 엉터리에다 허점투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짧은 머리에 바지를 즐겨 입을 뿐인데 말이다. 90년대 중반 PC통신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오해받는 정체성의 억울함은 오프라인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사근사근하지 않은 말투(정확히는 글투인가)와 소위 말하는 타자발이 좀 세다는 이유만으로! ‘왜 남자가 여자 행세를 하냐’며 채팅방에서 강퇴 되기를 몇 번. 한번은 너무 억울해서 그렇게 못 믿겠으면 목소리를 확인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때 나와 통화했던 그 사람은 다섯 명이 함께 있던 채팅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새 여동생 불렀나 봐요.’

그때부터 공개 채팅방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거슬리는 남자들’이 없는 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참하고 친절하게 말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신기한건 이것이 새로 습득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긴 잠에 빠져있던 무언가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기지개를 키곤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욕설이 없는, 비아냥이 없는, 거들먹거림이 없는 글을 본다는 것만으로. 따뜻한 감성과 체온이 느껴지는 글들을 만나면서. 꽃향기가 퍼지듯 그렇게 말이다.

그렇게 여자들만 있는 공간, 여성주의자들만 있는 공간에서 온라인 생활을 영위하며 억울했던 과거 따윈 말끔히 잊어버리고 살던 어느 날, 언니네(www.unninet.net)에서 흥미로운 사건-순전히 내 개인적인 시각에서-이 발생하게 된다. 지식놀이터와 자기만의 방에, 여자도 군대 가자는 요지의 글을 쓴 한 회원이 다수의 회원들로부터 ‘여성이라고 우기는 마초’로 오해받으며 비판과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 오해의 근거에 글의 논지를 제외시킬 수 없겠지만,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건 남성적인 말투와 표현방법이었다.

이 사건은 나를 되돌아보는 고마운 계기가 되어 주었다. 가만히 곱씹어보니 내가 남자로 오해받은 건 단지 타자속도가 빠르고, 나긋하게 이야기하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정말 ‘남자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장은 최대한 세게 말해야 먹힌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적당히 무시하며 끊어줘야 한다고 믿었으며, 어쭙잖은 통신어도 써줘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을 착실히 따랐던 것이다. 이 가르침은 주위의 남자친구나 선배뿐만 아니라, 학교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기준은 남자이니,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그럴 수밖에. 이런 깨달음이 씁쓸한 것은 그런 말하기 방식을 가진 이가 비단 나 뿐만은 아니라는데 있다.

1년여 전 사진을 매개로 형성된 한 대규모 커뮤니티 사이트의 드라마갤(‘갤’은 갤러리 형식의 게시판을 줄여 부르는 말)에서 ‘횽아’라는 단어가 유행의 급물살을 탄 적이 있다. ‘횽아’는 ‘형’이 변형된 단어로 이전의 ‘님아’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 처음 PC통신에서 ‘~님’이라는 의존명사가 등장했을 때는 이 말이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며, 특정한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인터넷 10대 문화는 ‘~님’을 ‘님아’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님아’는 존중의 느낌을 송두리째 사라지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듣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까지 만들었다.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한 무료 공개 게시판에서는 이 단어를 금지어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횽아’는 ‘님아’가 가까스로 지키고 있던 마지막 미덕 하나도 잃게 만들었다. 바로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 ‘횽아’는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모두를 남성으로 상정한다. 드라마갤에서는 한 여성의 문제제기로 ‘눈하(누나의 변형)’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했지만 거의 불려지지 않았으며, ‘언니’라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여성이 배제된 인터넷문화의 거대한 벽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성일까? 나는 자신 있게 NO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의 언어를 만든다는 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게 아닐까. 더 이상 나와 같은, 언니네의 그 회원과 같은, 횽아에 둘러싸여 자신을 잃어버리는 여성들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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