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9호(200611) 칼럼
디지털방송과 방송딱지

전응휘 / 평화마을 피스넷 사무처장   chun@peacene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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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헐리웃의 압력과 로비가 FTA의 협상테이블 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한류를 내세운 국내 콘텐츠 산업의 보호론자들이 콘텐츠의 보호를 위해 헐리웃류의 논리를 앞장세워 일반 이용자들의 콘텐츠 접근에 대한 통제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도 이곳저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의 디지털화와 함께 방송과 통신의 경계가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실제 그러한 융합을 일반 이용자들이 가장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디지털방송이다. HD급의 고해상 화질로 디지털 방송을 수신해 본 사람들은 방송의 디지털화가 왜 거역할 수없는 흐름인지 쉽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화질의 생동감과 정밀함 그리고 돌비채널 수준의 장중한 음장감에 빠지다 보면 앞으로 온디맨드 비디오(VOD, Video on Demand) 채널이 대중화되었을 때 과연 사람들이 영화상영관을 찾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러한 수준의 영상과 음향이 디지털 방송으로 구현될 때 사실 가장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바로 헐리웃 사람들이었다. 디지털방송으로 나간 프로그램이 녹화되어 인터넷으로 유포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브로드캐스트 플래그(broadcast flag)"라는 것인데, 디지털 영상물에 이 영상물이 방송용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헐리웃을 중심으로 한 산업체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이 방송딱지를 프로그램과 방송수신기 및 주변기기에 의무화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브로드캐스트 플래그가 표시된 디지털 프로그램은 이 딱지를 식별하는 입출력 단자와 결합하여 한정된 목적 이외에는 사용될 수 없도록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FCC는 이러한 입출력 단자를 갖춘 장비를 인증하고 승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디지털 콘텐츠 자체가 암호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해당 콘텐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녹화하여 옮길 때(혹은 송수신할 때) 가정용 비디오기기에서 녹화한 디지털방송 수상기로만 영상물에 대한 재생이 가능하므로 다른 용도로는 녹화된 영상물을 쓸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사적복제를 포함한 콘텐츠의 공정이용이 제한받게 된다.

시민사회단체들과 관련 전문가들은 FCC의 이 같은 정책이 일반이용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크게 반발했고, 소송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작년 5월 연방 순회법정은 이 사건에 대하여 FCC가 법에서 주어진 권한을 넘어서서 정책을 결정했다고 판결함으로써 사실상 브로드캐스트 플래그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당시 법원은 FCC는 방송통신관련 기기로 한정하여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뿐, 모든 가전제품의 단자의 형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즉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도 디지털방송으로의 전환과 관련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하여 디지털방송활성화추진위원회와 실무위원회가 구성되어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며칠 전 열린 실무위원회의 안건에는 놀랍게도 “브로드캐스트 플래그”가 안건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듣기로는 정보통신부와 문화부가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헐리웃은 FTA 협상 테이블 주변에서만 어른거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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