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39호(200611) 디지털칼럼
웹콘텐츠를 만드는 다른 방법, 시간

이강룡(웹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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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을 요즘도 고친다. 내 일과 중 하나는, 홈페이지 방문자들이 남긴 로그(방문 기록)를 보고 그들이 무엇을 검색했는지 살피는 일이다. 해당 검색어로 나도 한 번 검색해 본다. 검색 결과 중 글 하나를 선택해 편집 화면으로 들어가 보완한다. 그러면 앞으로 그 글을 읽게 될 독자는 새 글을 읽는 셈이다. 이 일을 3년 정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재미도 붙었다. 나 자신만 느끼는 보람도 있다.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시간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이른바 유씨씨(UCC, User Created Contents, 인터넷 사용자가 직접 만든 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 주관적 기준이지만 나는 이러한 유씨씨의 질을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한다. 얼마나 독창적인가, 아니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그냥 안아 드립니다.’(Free Hugs) 캠페인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국내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호주의 한 청년이 시드니 거리에 ‘Free Hug’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그 앞을 지나다가 피켓에 적힌 글을 보고 포옹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밝은 표정이다. 그는 이 일을 2년 동안 매주 하고 있다고 한다. 동참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을 시작한 젊은이도 있다. 시간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나는 신윤동욱 기자가 쓴 스포츠 기사를 좋아한다. 그의 글에서는 시간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선수가 몇 년 전에 어떤 경기에 나섰고, 어떻게 경기를 치렀으며 또 몇 년 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여러 장 겹쳐진 습자지처럼 한 운동선수의 세월을 압축해 보여준다. 나는 에스비에스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즐겨보는데, 이들이 달인이 된 비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반복하고 노력한 결과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간은 아래 기사문에 나온 산술적인 반복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대구교육청에 따르면 하루 10분 아침독서운동은 하루에 10분을 독서에 투자해 1년에 50시간 안팎의 시간을 책 읽는데 사용, 학생/교사들에게 독서습관을 형성시키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이처럼 하루에 10분을 독서에 투자하면 초등학교 입학에서 고교 졸업 때까지 모두 600여 시간을 독서에 사용할 수 있어 240권(1만8천 페이지) 가량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교육청은 계산하고 있다.” – 조선일보

머릿속에서야 못할 것이 어디 있으랴. 저런 것은 시간에 대한 모독이다. 플리니우스는 100명이 넘는 저자들이 쓴 2천 여권의 책을 끈질기게 연구하여 방대한 내용을 지닌《박물지》를 완성했다. 덴마크 출신 천문학자 브라헤는 남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오차'를 끈질기게 연구했다. 결국 그는 천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이들은 이른바 세기의 천재들이 지닌 독창성은 부족했지만, 그것을 시간의 힘으로 극복했다. 끈질기게 오랜 시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히, 뛰어난 재능이다.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정해진 분량을 매일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최선이다. 그러나 분량과 상관없이 매일 할 수 있는 – 이를테면, 매 경기 출장할 수 있는 - 경기력이 있다면 그것은 차선이다. 어쨌든, 쌓인 일은, 하는 만큼만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시간을 주무르며 나의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꾸준함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웹콘텐츠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온라인 형식으로 전환하면 그것이 이른바 훌륭한 유씨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사이클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그 선수의 코치가 이런 말을 했다. "프로 사이클 경기에서 승자는, 가장 빠른 선수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힘이 남아있는 선수입니다." 어느 술자리에서 암벽 등반 동호회 회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들은, 네 부류로 나눠진다고 한다. 안전장비를 갖추고 조금씩 높은 난이도에 도전하는 사람들, 대회출전을 목적으로 인공 암벽만 타는 사람들, 안전장비 없이 쉬워 보이는 코스만 타는 사람들(사고율이 가장 높은 부류라고 한다), 암벽에는 관심 없고 술 먹으러 오는 사람들. 이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암벽을 타게 될 사람들이 누구일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전은 오래된 작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딘 작품이다. 발효음식은 인간의 정성과 자연의 힘(시간)이 빚은 합작품이다.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 시간의 노고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진가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웹콘텐츠라고 하면 대개 독창성만을 중시한다. 시간의 노고가 반영된 콘텐츠는 드물다. 전자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오래도록 꾸준하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고전이나 발효음식 같은 웹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어떤 웹콘텐츠를 만들 것인가. 철학박사 강유원 씨는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닥치는 대로 한다. 다만 차곡차곡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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