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40호(200612) 표지이야기 [AIDS, 후천성인권결핍증]
감염인이 치료받으면 모두가 알게 된다
병원, 표식으로 둘러싸인 공간

홍지은 / 네트워커   idiot@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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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절대로 병원에 안 갈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들어온 일들만 생각해도 병원은 가고 싶지도 않아요. 얼마 전 죽다가 살아났어요. 혼전을 할 정도였는데, 쓰러지기 직전에 소리 질렀어요. 절대로 구급차 부르지도 말고, 병원에 가지 말라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HIV/AIDS 감염인은 이 한 사람만이 아니다. “병 고치러 왔다가 병 걸려 나간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누구보다도 병원에 자주 가야 하는 이들이 병원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HIV/AIDS 감염인이 가장 자주 접하는 공간인 병원은 오히려 감염인에 대한 이해가 가장 부족한 공간이다. 의사를 비롯한 병원 관계자들의 부주의와 임의적 판단으로 무차별적인 신상정보 노출이 발생한다. 그래서 감염인들은 일상적인 생활공간보다 병원에서 위축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보호자에게 알려야 할 의무?

병원에서 감염인이 ‘노출’되는 순간은 자신이 HIV/AIDS 양성임을 확인하는 시점부터이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시행한 에 의하면 조사 대상 감염인(255명) 중 50.1%(127명)가 병원에서 한 HIV검사를 통해 감염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이러한 검사의 대부분이 본인의 동의 없이 이뤄진다. 감염사실의 통보는 본인이 아닌 병원에 함께 간 가족에게 알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태 조사 중 ‘주변인에 의한 감염사실 누설 경험’을 묻는 말에 ‘의사, 병원직원, 간호사에 의한 누설 경험’이 가장 많이 꼽혔다. 감염인들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다른 질병처럼 에이즈도 보호자나 지인에게 병명을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감염사실이 본인의 동의 없이 알려져도 이에 대한 법적인 제재(1년 이하 징역, 1000만 원 이하 벌금)가 약한 점도 한 이유이다.

이처럼 감염인이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감염사실이 주변에 알려졌을 때, 당사자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파괴적이다. 의사가 본인 확인을 하지 않은 채, 감염인의 형을 감염인으로 오인해 HIV 양성임을 알려 결국 감염인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을 나온 일도 있다. 심지어 어머니에게 자식의 감염 사실을 알려서, ‘10달 배 아파 낳은 자식’의 감염사실을 어머니가 직접 자식에게 통보하기도 한다. HIV 양성 판정 이후 대부분의 감염자가 가족 관계의 물리적, 사회적 단절을 겪는 것을 고려하면 감염사실 노출에 대한 유효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

병원에 들어가는 순간 낙인이 찍힌다

‘표식’의 경험은 감염인이 병원에서 겪는 가장 흔한 인권침해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자신의 감염사실을 밝히지 않고 살더라도, 병원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곳이기에 노출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진료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감염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문제이다. 감염인이 병원에 가면 당장 접수처의 직원이 자신의 질병을 말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입원이라도 하면 감염인 병상에는 ‘A+’ 또는 ‘I+’라는 딱지가 붙는다. 혹시라도 의료진에게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감염인이 겪는 사생활 침해 정도는 심각하다. 감염인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의 감염사실을 알게 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결과 전체 조사 대상자 255명 중 180명이 ‘차트나 병실, 수액 병, 식기 등에 자신의 감염사실을 표식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최근 병원마다 도입하고 있는 전자의무기록(EMR·Electronic Medical Record)시스템도 감염인에게 위협적이다. EMR는 환자 정보를 볼 수 있는 통합 시스템으로 감염인을 직접 치료하지 않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의대생들까지 여기에 접근하여 HIV/AIDS 감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병원의 운영 구조 자체가 감염인의 프라이버시를 위협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생활 침해 때문에 감염인의 건강권이 위협받는 상황이다. 실태 조사에서 감기 등 가벼운 질환에 걸렸을 때에도 병원을 가지 못한다는 감염인이 21%(53명)에 이르렀다. 또한, 응답자의 51.3%(124명)는 치과 치료 등 일반적인 건강문제로 병원에 갈 때 감염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에이즈 전문병원이 대안인가

병원에서 감염인들이 겪는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 최근 국회에서 논의된 것이 바로 ‘에이즈 전문병원 설립’이다. 지난 10월 12일 국회 보건복지부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은 <에이즈(AIDS) 정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국정감사 정책 자료집을 발표했다. 안 의원은 자료집에서 “국가는 감염인들이 눈치 보지 않고 충분한 치료와 요양을 받을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라며 에이즈 전문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감염인 단체를 비롯해 보건의료시민단체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펼쳐진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Positive Right(긍정적인 권리)’ 중 열린 <한국의 에이즈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포럼에서 ‘한국HIV/AIDS감염인연대(KANOS)’의 강석주 사무국장은 “에이즈 전문병원의 시도 자체가 문제이다. 전문병원을 개설할 경우, 치료보다는 격리의 효과가 더 크다. 예전에도 지정병원 제도가 있었으나 폐지됐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극심해서 오히려 감염인의 치료 접근권을 막았기 때문이다. 전문병원이 아니라, 모든 병원에서 감염인이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형 병원에서 3~500명의 감염인을 위해 모든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감염인들은 정부의 정책 변화가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질병에 대한 모든 것이 당연히 개방되어야 한다는 정책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병원 시스템도 바뀐다는 이야기다. 선진적인 에이즈 정책을 펼치는 나라에서는 정부가 감염인을 코드화된 번호로 관리를 하기에, 우리나라처럼 병원 접수창구에서 “OO씨, 에이즈 환지이시죠?”라는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

병원의 업무는 전문화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기에 한 사람의 치료에 다수의 의료인이 참여한다. 노출은 불가피하며 이는 비단 감염인뿐만 아니라, 모든 환자들에게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감염인은 다른 환자들처럼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느낄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누구에게는 더 치명적이다. 그가 바로 HIV/AIDS 감염인이다.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병원이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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