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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영화
<매트릭스 리로디드>: 기계와 '가상'공간에 대한 시각의 확장

김명진  
조회수: 4922 / 추천: 68
1999년에 개봉했던 <매트릭스> 1편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만들어냈으며 학술회의장에 모인 철학자들을 골몰하게 만들었던 보기드문 SF영화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선을 보인 2편 <매트릭스 리로디드>는 개봉에 앞서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고편 다운로드 수가 500만번을 넘어서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개봉 후에는 각종 흥행기록을 갈아치움과 동시에 격렬한 찬반 양론과 향후 이야기 전개에 관한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에서는 작년과 올해에 걸쳐 '매트릭스와 철학'이라는 주제를 다룬 여러 권의 단행본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 중 한 권은 최근 국내에도 번역·소개되어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일반 관객들과 소수의 매니아층, 여기에 철학자들이 서로 뒤엉켜 빚어내고 있는 작금의 진풍경은 가히 '매트릭스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성싶다.

낯익은 발상, 그러나 독창적인....

<매트릭스> 시리즈는 창의적인 촬영 기법과 정교한 액션 장면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설정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다. <매트릭스> 1편을 돌아보면 이는 크게 두 가지 설정을 축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기계의 인간에 대한 반항 내지 지배'라는 모티브인데, 이것은 거대한 기계가 작업장에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의 소외를 가중시켰던 산업혁명기까지 그 기원을 소급해갈 수 있는 낯익은 발상이다. 이 오랜 모티브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디지털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1960년대를 풍미했던 인공지능(AI)에 관한 낙관적 기대였는데(브루스 매즐리시가 쓴 {네번째 불연속} 같은 저작이 바로 그런 낙관적 기대의 산물이다), 1968년에 개봉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자신의 의지를 갖고 인간의 뜻에 반항하는 AI의 모습을 보여준 선구적 영화였고, 이런 이미지는 이후에도 <악령의 종자>(1977), <트론>(1982), <슈퍼맨 III>(1983), <터미네이터>(1984) 등에서 면면하게 이어져 왔다.
이어 두 번째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 사이의 흐려진 경계'라는 모티브로,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발전과 온라인 공동체 등장과 함께 생겨난 주제이다. 영화에서는 <트론>을 그 시조로 볼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론머맨>(1991)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며, 이후 <토탈 리콜>(1990), <덴젤 워싱턴의 킬링머신>(1995), <오픈 유어 아이즈>(1997), <엑지스텐즈>(1999) 등 수많은 영화에서 차용된 바 있다. 현실공간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모두 '가짜'였다는 설정 역시 <다크 시티>(1997)나 <13층>(1999)이 한 발 앞섰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첫 번째 모티브에서 핵전쟁과 같은 냉전의 그늘을 벗겨낸 후 이를 두 번째 모티브와 흥미로운 방식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그 나름의 독창성을 확보했다. 어찌보면 '낡은' 설정들로부터 새로움을 만들어낸 것이다.

현실과 가상사이의 모호한 경계

<매트릭스 리로디드>는 이 두 개의 모티브 각각을 좀더 심화(?)시키고 있다. 먼저 기계의 인간 지배라는 모티브는 '지능을 가진 기계의 각성과 인간과의 대립'이라는 SF적 세계를 넘어 '기계에 대한 인간의 불가피한 의존'이라는 일상적 주제로 확장되었다. 말하자면, 기술결정론이 신화의 영역에서 땅 위로 내려온 것이다. 이는 극중 등장인물인 평의회 원로가 시온의 지하로 내려가 네오와 나누는 대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기계에 맞서 투쟁하는 인간들의 삶이 또다른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설을 언급하면서, 과연 기술에 대한 '통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네오에게 묻는다(이는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기술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자끄 엘륄[Jacques Ellul] 같은 철학자의 비관적 기술관을 상기시킨다). 성급한 논자들은 이를 보고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주장하는 메시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는 이후의 전개를 좀더 두고볼 일이다(첨언하자면, 인간과 같이 사고하는 AI의 등장을 기정사실화한 후에 전개되는 SF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인간-기계 관계에 어떤 함의를 던져줄 수 있을지는 사실 애매한 문제임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 사이의 모호한 경계'라는 모티브는 <리로디드>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또다른 가능성을 내비친다. <매트릭스> 1편은 우리가 살고 있는 1999년의 현실공간이 실은 컴퓨터에 의해 관리되는 가상공간이라는 화두를 내밀어 많은 이들을 헷갈리게 했다. <리로디드>는 현실공간으로 돌아온 네오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센티넬'(기계 추적자)들을 제압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유력한 설명은 시온이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공간 역시 또다른 가상공간, 즉 '매트릭스'일 가능성(<13층>에서처럼 겹겹이 쳐진 현실과 가상의 존재)인데, 현재 이를 놓고 흥미로운 토론이 진행중이다(관심이 있다면 http://www.matrixmania.co.kr 같은 팬페이지에 들러 보시길).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 ― 인간과 기계, 현실과 가상, 자유의지와 필연에 관한 최종 토론 ― 은 3편 <레볼루션>이 베일을 벗는 11월 이후로 일단 미루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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