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5호 표지이야기 [누가 인터넷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표현의 자유 운동, 인터넷 문화를 일구다

장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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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의 한 판결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클린턴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통신품위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이 법은 인터넷을 이용해 청소년에게 ‘음란하거나’ ‘품위없는’ 자료를 전송하거나 게시할 경우, 그리고 ‘불쾌한’ 성행위를 묘사할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통신품위법 반대운동에서 시작되다

연방대법원은 ‘품위없는’이나 ‘불쾌한’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규제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라 하더라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특성에 맞게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터넷은 인류역사상 표현의 자유를 가장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매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통신품위법 위헌 판결이 나기까지, 수많은 단체와 네티즌의 노력이 있었다. 통신품위법이 1996년 2월에 의회를 통과하고 대통령 서명을 거쳐 공포되자, 미국시민권연합이 즉각 필라델피아 연방지방법원에 위헌소송을 제기하였고 미국도서관협회를 비롯한 30개 단체 역시 유사한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그해 6월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에서 이 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연방대법원이 이를 확정한 것이다.
통신품위법 반대운동은 인터넷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자개척자재단’은 배너달기 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블루리본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으로 블루리본은 인터넷 검열반대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전세계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를 장식했다. 블루리본 캠페인은 미국 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 불가리아, 캐나다, 프랑스, 영국, 우르과이 등 세계 각국의 인터넷 검열반대 운동에서 이어갔고 전세계 68개 단체가 참여한 ‘국제인터넷자유캠페인’(http://www.gilc.org)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온라인 사이트 파업에 350개 사이트 참여해

프로그래머인 데이브 위너가 제안한 ‘24시간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최초의 온라인 사이트 파업이었다. 24시간 민주주의 프로젝트는 통신품위법의 의회 통과에 항의하여, 1996년 2월 22일 만 하루동안 일제히 사이트 운영을 중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글과 그림으로 채우자는 제안이었다.
이 운동에는 350개의 사이트가 참가했는데 여기에는 개인들 뿐 아니라 <핫와이어드>, <애플 컴퓨터>, <아메리카 온라인> 등 유명 웹진과 컴퓨터, 통신회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위너가 제작한 ‘웹로그’는 오늘날 ‘블로그’의 시초가 되었다.
존 페리 바를로는 1996년 2월 8일 지금은 유명해진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산업세계의 정권들, 너 살덩이와 쇳덩이의 지겨운 괴물아. 나는 마음의 새 고향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미래의 이름으로 너 과거의 망령에게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대장정

한국에서도 90년대 중반 본격적인 내용 규제가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반대운동도 거세게 일었다. 1993년 사노맹의 유인물을 PC통신에 옮겼다는 이유로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현철동)가 이틀간 폐쇄되고 회원이 구속되었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내외신문에 실린 김일성 신년사를 옮겼다는 이유로 천리안 희망터 동호회의 회원이 구속되어 많은 네티즌이 반발하였다.
1994년에는 <공산당 선언> 등 불온서적을 올렸다는 이유로, 1996년에는 사회단체 유인물을 게시판에서 내려 받았다는 이유로 현철동 회원들이 구속됐다. 1995년부터 ‘불온통신을 단속하기 위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자 PC통신 동호회와 정보운동 단체들이 함께 ‘정보통신검열철폐를위한시민연대’를 결성 <검열백서>를 발간하고 검열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사회단체들이 함께 전기통신사업법의 ‘불온통신’ 조항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2002년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을 받기도 하였다.
인터넷 표현의 자유 운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 규제정책은 이 운동에 의해 변화해 왔다. 통신품위법이 위헌 판결을 받자 인터넷등급제 논란이 불거졌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차단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인터넷브라우저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인터넷 등급제의 국제표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GLAAD 등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들은 “차단 소프트웨어와 등급제는 레즈비언과 게이 사회를 없애버리려는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정부도 법제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1998년에는 통신비밀보호법의 모호한 규정을 구체화한 ‘어린이온라인보호법’이 하원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 역시 1999년 2월 필라델피아 연방지법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판사는 “어린이온라인 보호법의 취지는 이해하나 보호라는 명분으로 장차 어린이들이 물려받게 될 표현의 자유를 침식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어린이들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법안을 계속 손질한 끝에 음란사이트 접속차단 프로그램을 설치한 도서관에 지원금을 주는 내용의 ‘어린이인터넷보호법’을 제정하여 현재 시행 중이다.

미국의 테러방지법, 한국의 국가보안법

표현의 자유 논란이 청소년 보호 문제에서만 불거진 것은 아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애국자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법으로 등장했다. 미국을 좇아 세계 각국이 테러방지법을 도입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국가와 시민 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방은 계속될 것이고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인터넷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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